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녜 Aug 23. 2020

루틴한 귀여움은 내게 안정감을 줘

어젠 뭘 했냐면요 6: 강아지 산책을 나갔답니다

매일 한 번 이상,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을 제외하고는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바로 우리 집의 털북숭이 막내, 호두와 산책을 나가는 것.


아주 솔직히 말하면 때로는 귀찮거나 힘들 때도 있는 숙제다.


특히 이렇게 덥고 습한 여름날, 에어컨과 선풍기 앞을 떠나서 땀범벅이 되는 것이 뻔할 여정에 나가는 것은 생각만 해도 찐득하다. 생리통이 있어서 배가 너무 아프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할 때도 잠깐이라도 나가야 한다. 산책을 함께 시키는 동생도 나도 저녁에 약속이 있어 밤 산책을 못 나갈 때는 미리 아침 산책을 계획하고 알람을 맞춰둬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강아지와 산책을 나가는 이유는, 이게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지만 내게도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 강아지와 내가 가지는 암묵적인 규칙과 습관들이 특히 그런 기분을 안겨준다.



우리 둘의 규칙과 습관들은 이러하다.


첫 번째, 산책 나갈 땐 검은 모자에 검은 신발.


나는 산책에 나갈 때 똑같은 모자를 쓰고, 똑같은 신발을 신는 편인데, (사실은 막 더럽혀져도 좋을만한 모자와 신발이 그것 하나씩 뿐이기 때문에 시작되긴 했지만) 이게 호두에게는 하나의 사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이 모자와 신발이 보이면 펄쩍 뛰며 재빨리 하네스와 리드 줄이 들어있는 통 앞으로 달려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주저앉는다. 이 표정과 몸짓과 위치가 얼마나 한결같은지, 아직 산책을 나가기 전부터도 산책 나가기 너무 잘한다는 뿌듯함이 밀려온다.


두 번째, 간식을 먹고 싶거든 보폭을 맞추기.

꽤나 덩치가 큰 친구이기에, 산책을 할 때의 가장 큰 고충은 호두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렇게 끌고 다니다가 내가 힘이 빠져 놓쳐버리면 큰일이 생길 수도 있고,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서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훈련법들을 써봤지만, 역시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간식이었다.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서면 앉아서 기다리기, 줄이 팽팽해져서 내가 멈춰 서면 다시 되돌아 오기, 좁은 길에서 사람이나 차가 지나갈 때 줄을 당기면 내 옆에 앉기. 이런 행동을 할 때마다 옳지, 라는 추임새와 함께 간식을 주곤 했다.

간식타임?

그러다 파생적으로 생겨난 귀여운 습관이 있다. 내가 먼저 부르지 않는 경우에도 간식을 먹고 싶으면 앞서가던 걸음을 다시 늦춰서 내 옆에서 슬그머니 눈치를 본다는 것.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어떻게 하나 지켜보고 싶어 그 시그널을 못 본 체하고 계속 걸어가면 슬쩍 앉아서 간식을 줄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 이 예측 가능하고도 소심한 애교에 나는 매번 껌뻑 넘어가고 만다.


세 번째, 집에 돌아와서는 집 냄새를 한껏 묻히기.

뒹굴뒹굴!

대체 무엇을 위해서, 혹은 무엇 때문에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호두는 집에 돌아오면 마당을 한 바퀴 휘휘 돌고는 바닥에 엎드려 본인 몸에 풀냄새 흙냄새를 잔뜩 묻힌다. 집에 왔다고 세리머니라도 하는 걸까? 가끔은 내 발 위에 드러누워하는 경우도 있다. 내 냄새도 묻히고 싶은 건지, 혹은 나도 하라고 재촉하는 건지 헷갈리면서도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럴 때 내가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호두의 흥을 깨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 잠깐 의자에 앉아 비비기 세리머니가 끝나기를 잠깐 기다리면, 호두는 또 특유의 자본주의 눈빛을 띄고 찬찬히 걸어온다. 산책하고 남은 간식들이 있는 걸 다 알고 있으니 어서 내놓으라는 신호다. 간식이 없다고 시치미를 떼면 다시 몸 비비기로 넘어가다가, 주머니에서 뽀시락 거리는 소리는 대체 언제 들었는지 금세 다가와 주둥이로 주머니를 툭툭. 정말 이겨낼 수가 없다.



예측 가능한 귀여움을 일상에서 접할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안정감을 준다. 때로 어떤 일이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혹은 무기력할 때, 산책이라도 한 번 다녀와야지 싶으면 혼을 쏙 빼놓는 털북숭이 덕에 아주 바닥으로 가라앉지는 않을 수가 있다. 물론 아직 완벽한 합을 이루고 있지는 못하다. 길에 떨어져 있는 음식 주워 먹지 않기, 싫다고 하는 친구에게 인사한다고 떼쓰지 않기 등, 서로 맞춰가야 할 약속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귀여우니까, 사랑스러우니까, 저 반짝이는 눈을 다시 마주치고 싶으니까.


내일 아침 나는 호두의 보채는 소리를 들으며 산책 빚쟁이라며 뒤척이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겠지만 그래도 안다, 다녀오고는 분명 기분이 좋을 것이라는 걸. 귀여운 모습에 한참을 웃고 있을 거라는 걸. 그리고 이제 처서 매직이 통한다면, 함께하는 산책에 날씨라는 조미료도 뿌려질 것이라는 걸. 내일 또 나가자 호두!

매거진의 이전글 늦여름, 개 산책의 미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