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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Aug 23. 2020

늦여름, 개 산책의 미학

어젠 뭘 했냐면요 6: 개와 산책을 했습니다 


10년이 넘은 루틴이다.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는다. 산책용으로 구입한 하늘색 크로스백엔 개를 위한 물 한 통과 핸드폰. 풉백은 리드 줄 끝에 달려있다. 개에게도 10년이 넘은 루틴이다. 내가 산책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꼬리 흔드는 걸 보고 싶은 마음에 어야 갈까, 괜히 한 번 더 묻기는 하지만. 해가 완전히 지기 전 어스름한 시각에 우리는 같이 현관을 나선다. 


개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릴 줄 안다. 태어나 지금껏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탓이다. 어떻게 작동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 앞에서 잠깐 기다리면 곧 문이 열린다는 걸 안다. 안으로 들어가 또 잠시 기다리면 다시 문이 열리고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진다는 것도 안다. 개에게는 아마 마법의 문이 아닐까. 엘리베이터 문 틈 새에 코를 갖다 대고 킁킁, 꼬리는 붕붕 흔든다. 곧 나타날 세상이 얼마나 좋을지 이미 알고, 또 그만큼 기대하고 있으므로. 


1층에 닿아 문이 열리자마자 땅을 차고 뛰어나간 개는, 막상 아파트 유리문을 나서면 우뚝 멈춰 선다. 딱히 무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서 잠시 기다린다. 오늘의 공기를 가늠해보는 모양 같기도 하고 펼쳐진 두 갈래 길 중 오늘은 어디로 갈지 고심하는 것 같기도 하다. 서두르지 않고 나도 가만히 서서 기다린다. 바람이 닿아오는 간지러움을 느끼며. 하늘을 한 번 보고 긴 숨을 한 번 들이마실 때쯤 개의 결정이 내려진다. 선택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오늘은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다. 




일단 어디로 첫 발을 내딛을지 결정하면 박자감은 바로 경쾌해진다. 타닥 타닥 타닥 타닥. 거기다 시작이 내리막길이라 가속도가 붙는다. 그냥 걷는 것으로는 따라잡기 힘들어서 나도 털레털레 반쯤은 뛰어 언덕길을 내려간다. 내리막 중간에 멈춰서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자로 쭉 뻗은 길을 힘차게 다 내려간다. 평지를 만나면 그제야 멈춰 서서 냄새를 한 번 킁킁. 화단 구석 쪽에 마킹을 쪼금. 그러고 나서야 박자가 느긋해진다. 출발의 설렘을 조금은 덜어낸 덕일까. 


타닥- 타닥- 여기서부턴 가로수도 드문드문 있어 그 둘레의 냄새를 꼼꼼히 맡는다. 아마 다른 개가 이미 한 번 밟고 지나갔을 흙들. 서두를 것도 없이 여유로와 한참을 킁킁댄다. 그렇게 느릿느릿 사람도 많고 개도 많은 큰 길가로 접어든다. 나는 바로 경계태세에 들어가 어깨에 힘을 꽉 주고 개는 그저 신이 난다. 복잡한 길을 지나 여유로운 옆 단지로 가려면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야 한다. 그 짧은 기다림을 못 참고 개는 끄응 운다. 산책길에 들뜬 개에게는 그 몇십 초가 얼마나 길까. 초록불이 켜지고, 신호등을 읽지 못하는 개에게 '가자!' 신호를 주면 기다렸다는 듯 뒷발을 박찬다. 초록불이 켜졌다고는 해도 찻길이므로 나는 양 옆을 번갈아 경계하며 개를 따라 뛴다. 그 경쾌함을 방해할 수는 없다. 


2년 전 살았던 옆 단지는 주위가 나무로 울창하고 산책로도 잘 닦여 있어 개가 좋아한다. 길가로 웃자란 풀을 풍덩풍덩 밟으며 어쩐지 과장된 발걸음으로 걷고, 곳곳에서 냄새를 맡으며 마킹을 한다. 혹시 풀숲에 진드기가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나는 그 길을 따른다. 멀리서 달려오는 다른 개나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가 없나 두리번두리번. 그 충직한 보디가딩 아래서 개는 충분히 냄새를 맡고 오줌을 싸고 괜히 뒷발을 차기도 한다. 그 사이 해는 소리 없이 지고 사위는 점점 어둑해진다. 개의 하네스에 달린 푸른색 라이트를 켠다. 혹여 반대편에서 오던 누군가 놀라지 않도록, 반대로 그래서 개가 놀라는 일도 없도록. 그렇게 반짝반짝 아파트 단지를 끼고 산책로를 한 바퀴 크게 돌아 단지 안으로 들어선다. 


깜깜한 밤에는 푸른색 라이트를 달고 


익숙한 길에 개는 거침이 없다. 꼭 들려서 터치다운을 해야 하는 스폿들도 정해져 있다. 아주 단단히 먹은 마음이라 거길 다 밟지 않고서 지나치는 법은 없다. 몇 년째 변함도 없어서 이제는 눈을 감고도 안내할 수 있을 구석구석. 개에게는 그것이 꼭 시간과 공을 들여 점령해놓은 영토와 다름없다고 했던가. 못 본 새 다른 개가 빼앗진 않았는지, 내 땅이 잘 있는지 확인하러 옮기는 잰걸음은 어쩐지 당당하다. 냄새를 확인하고 마킹을 하고 뒷발로 흙을 탁탁 쳐내 제 냄새로 땅을 다시 한번 덮는다. 일련의 과정이 자연스럽고도 힘 있는 게 어김없이 땅주인의 그것이다. 


개중 그날따라 유난히 마음에 드는 곳에서 개는 신중히 자리를 잡는다. 너무 풀숲이 우거지기보다 발아래 흙이 드러난 곳이면 좋다. 발톱을 한 번 쿡 찍어보고는 뱅글뱅글 돈다. 어디와 방향을 맞추는지 몰라도 하여간 어김없다. 열심히 각을 재가며 돌다가 엉거주춤 멈춰 선다. 엉덩이를 낮추고선 몸이 힘을 꾸욱. 자세가 확실해지면 나도 풉백 하나를 뜯는다. 볼일을 보는 동안 개는 어쩐지 그간의 당당함이 싹 지워진 불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가장 나약한 순간, 나를 지켜줘- 하고 동맹을 쳐다보는 얼굴이랬다. 동맹 정도로 생각해준다면 다행이지. 개의 볼일이 끝나면 나는 곧 그 똥이 담긴 풉백을 달랑달랑 들고 뒤를 따라야 하니까. 


속을 비워낸 개의 걸음엔 잠깐 다시 경쾌한 스피드가 붙는다. 약간의 경사가 나오면 타다닥 신나게 뛰어내려 가는 몸이 정말로 좀 전보다 가볍게 통통 튀는 것 같아 웃음도 난다. 그러나 아직 습하고 더운 열기가 남은 저녁이라 걸음은 곧 느려진다. 넓은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즈음 돌고 나서다. 이제 얼추 할 일은 마쳤군, 싶어 그런지도 모르지만. 


그즈음 가로등 아래 자리를 잡고 물을 한 번 마신다. 전용 노란 컵에 차가운 물을 한 가득 따라주면 앞으로 다가와 주위를 먼저 둘러본다. 내가 서서 기다리면 계속 그렇게 경계를 놓지 못하므로 나도 몸을 낮춰 쪼그려 앉는다. 마음이 놓이면 곧 찹찹 물을 마시는 여름의 소리. 서너 번 찹찹거리곤 고개를 흔들거리며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본다. 풀숲에서는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 개의 등에서는 파란 불이 반짝반짝. 그렇게 기다리다가 또 두어 번 찹찹. 마실 만치 마셨다 싶으면 잠깐 서서 가만히 숨을 돌린다. 그러다 물통을 지나 한 발자국 먼저 옮긴다. 다 마셨으니 가잔 얘기다. 




그 뒤로는 박자감이 한 번 더 느려진다. 타악, 탁. 타악, 탁. 목을 축였어도 가빠진 숨이 다 가신 건 아니라서다. 느려졌다고 산책이 지겨워지진 않는다. 그 덕에 군데군데 냄새도 더 오래 맡는다. 재미없으니 그만 가자는 법은 없이 천천히라도 뚜벅뚜벅 걷는다. 화단 안 쪽에서 튀어나오는 고양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바로 들뜨고 말지만, 고양이들이란 본래 숨어다니기를 능사로 하니까. 우리는 점점 더 느려지는 리듬을 맞추며 반 바퀴 정도를 더 걷는다. 어릴 땐 세 바퀴도 네 바퀴도 거뜬했지만 그새 시간이 많이 흘렀다. 


진작 혀는 길게 나와 헥헥대고 있었지만, 영 힘들어지면 개는 우뚝 멈춰 선다. 멈춰 서선 헥헥 가쁜 숨을 내뱉으며 열을 식힌다. 더 걸으려나 잠깐 기다리다가 넌지시 '안아줄까?' 물으면 가끔은 휙 앞장서 질러가고 가끔은 물끄러미 쳐다본다. 무언가 기다리는 얼굴이라. 나는 가뿟하게 개를 안아 든다. 왼팔로 엉덩이를 받치고 오른팔을 내어주면 개는 편안히 가슴팍과 앞발을 오른팔에 기댄다. 이것도 십수 년 맞춰온 합이다. 그렇게 안고서 남은 반 바퀴를 돌아온다. 제 무게를 온전히 다 내준 개는 그렇게 기대앉아 지나가는 사람과 개와 풍경과 차를 구경한다. 쫄랑쫄랑 걷는 어린 개를 보면 고개가 휙 돌아가지만 짖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구경할 뿐. 관람에 방해가 될까 나는 느릿느릿 조심히 걷는다. 




개를 받쳐 든 팔이 조금 저릿저릿해질 때쯤 우리는 집 앞으로 돌아온다. 사십 여분 되었을까. 두 시간을 돌고도 뛰어다니던 예전에 비해 확실히 짧아서 어딘가 허전하다. 선선한 밤에는 벤치에 앉아 남은 바람을 좀 더 즐겨도 좋다. 요즈음은 모기가 많아 오래 앉아 있지는 못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개가 싫어하는 목욕을 해야 하고, 드라이기로 털도 말려야 하고, 영 낫지 않는 피부염에 소독약을 뿌리고 연고를 바르느라 한바탕 싸워야 한다. 지난한 일상은 그대로 이어진다. 그래야 하지만, 그래야만 하겠지만, 오늘도 잠깐이나마 둘이서 이렇게 리듬을 나누었다고. 때때로 멈춰 서고 가끔은 땅을 박차고 달리면서 서로 너무 멀어지지 않게 맞춰왔다고. 


늦은 여름 저녁, 오늘의 산책에도 이렇게 예술이 깃든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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