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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화 Mar 21. 2022

드라마에 주의 문구 좀 부탁드려요

주의: 이 드라마는 중간에 주인공의 부모님이 돌아가십니다


한참 한국 드라마를 보지 않다가 최근에 연이어 몇 개를 보았다. 시끌벅적할 땐 모른 척하다가 다들 시즌2를 기다릴 때가 되어서야 정주행 한 <술꾼도시여자들>이 하나고, 그게 좋았기에 이번엔 엄청 시끌벅적한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조금 늦게 시작해 실시간까지 따라잡았다. 하나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지만 둘 다 좋은 드라마다. 또 아무런 예고 없이 나를 울렸다는 사실만 빼고.

 






<술꾼도시여자들>은 그 유쾌함에 폭 빠져 주말 이틀을 꼬박 바쳐 봤다. 보다 보니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은 인생들이 녹아 있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지금 내 나이와 동갑인 주인공들이 나와 내 친구들을 떠올리게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좋았는데, 극 중 소희가 ‘아빠가, 죽었대요.’하고 뛰어나가는 순간부터 망했다. 드라마가 망했단 게 아니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드러누워 그걸 보고 있던 내가 망했단 거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일시정지를 누르면서 그 화를 겨우 넘겼으므로 그게 몇 화인지도 잊히지 않는다. 9화였다. 그 드라마는 9화를 통째로 할애해서 그 얘기를 했다. 길지 않은 드라마의 메인 서사 중 하나였다. 아빠의 죽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딸, 그걸 붙들어주는 친구들, 장례식장, 염을 하는 모습, 찢어지는 울음들…


나는 그 드라마가 좋았고 꼭 끝까지 보고 싶었으므로 그걸 다 이겨냈다. 글쎄, 그래서였을까. 한 3년 전만 되었어도 드라마가 좋건 말건 그쯤에서 꺼버리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 회차를 건너뛰거나. 하여간 이번엔 아릿한 무언가를 달래려 베개를 꽉 끌어안고 그걸 끝까지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드라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는 걸 엄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어느 순간부터는 에어팟을 낀 채로. 역시 이런 내용을 보고 울고 있다는 것도 들킬 수 없으므로 소리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아빠와 같이 드라마를 볼 때는 암에 걸린 인물이 등장하는 게 그렇게 싫었다. 무슨 드라마마다 암 걸린 사람 한 명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조항이라도 있는지. 여길 틀어도 저길 틀어도 꼭 그런 내용이 나와서 큼큼 헛기침을 하곤 했다. 아빠의 몸 안에 커다란 암 덩어리가 있다는 걸 모르는 척 발버둥 치던 시기였으므로 제발 그런 소재는 피하고 싶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건 너무 흔해서, 또는 작중의 어떤 반전이나 스토리텔링에 이용되기 십상이므로, 시놉시스나 인물 설명에 쓰여있지도 않다. 이 드라마 괜찮다며 같이 한참을 보다가 거기 누가 덜컥 암에 걸려버리고, 세상 무거운 음악이 깔리며 의사와 병원과 수술실 같은 것들이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채널을 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어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되지도 않는 딴청을 피웠다. 아, 아빠 있잖아, 저번에 회사에서 누가 그러는데, 요즘 그게 유명하다던데? 그게 뭐라더라 이름이… 급하게 꺼낸 얘기는 기승전결은 커녕 알맹이도 없기 마련이었고 tv소리를 이겨보려는 내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내가 생각해도 매우 어색한 노력이었으므로 아마 아빠는 다 알았을 거다. 내가 왜 갑자기 그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지. 왜 필사적으로 아빠의 눈과 귀를 내게 돌리려 하는지.


이제 암은 괜찮다. 아빠와 똑같은 간암이면 또 마음이 덜컹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희도가 이미 떠난 아빠를 그리워하는 모습을 간간히 보여주었는데, 그 정도도 괜찮다. 아빠 보고 싶어. 그 정도의 말에는 꿋꿋할 수 있다. 나도 아빠 보고 싶은데. 속엣말로 웅얼거리지만 울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 드라마도 11화에선 결국 나를 울렸다. 아빠 산소에 찾아가 금메달을 꺼내놓는 희도와, 어린 딸 앞에서 그간 숨겨오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눈물로 펑펑 쏟아내는 재경 때문에. 희도가 자꾸만 아빠와의 애틋한 과거와 쓸쓸했던 장례식을 번갈아 회상하는 바람에. 이번엔 집에 아무도 없어 편하게 울 수 있었다. 그러는 내내 드라마를 원망하긴 했지만. 그냥 풋풋한 사랑 이야기나 계속해주시면 안 될까요. 주인공들의 성장에 부모의 죽음이 가미되는 거 너무 클리셰 아닌가요. 저는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드라마를 보는 건데. 그럴 땐 연기를 너무 실감 나게 잘하는 배우들조차도 원망스럽다.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세상 모든 이별 노래가 내 얘기 같이 들린다 했다. 이것도 비슷한 유형의 자아 팽창인 것 같다. 연인과의 이별에 대한 노래도 나는 종종 내 식대로 해석해 들으며 아빠를 떠올리곤 했으니까. 드라마에서 내 기억의 한 부분과 너무 유사한 장면과 감정을 어떤 은유도 없이 보여주는데, 그게 내 생채기에 닿지 않을 리가 없다. 어떤 창작물이든 보기 전의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하는 편이지만, 넷플릭스에서 폭력성이나 선정성 정도의 등급을 붙여주고 ‘섬광 주의’ 같은 경고를 내보내듯 이런 것도 미리 좀 알려주면 좋겠다. 이 드라마는 중간에 등장인물의 부모님이 아픕니다. 암에 걸립니다. 죽습니다. 혹은 이미 죽었습니다. 장례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이 부모님을 내내 그리워합니다. 울 준비를 하세요. 이런 얘기에 울 것 같으신 분은 꼭 혼자 시청하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란 걸 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이들의 예민한 부분을 미리 경고해주려면 내용을 다 까고 시작해야 할 테니까.)






이런 상처는 결코 작아지진 않지만 내가 자라면서 점점 더 내 안에서의 비중이 줄어든다고 했던가. 적어도 아빠의 ‘아’ 소리만 들려도 드라마고 예능이고 뭐고 채널부터 돌려버리던 초반에 비해선 성장했다고 해야 할까. 이런 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눈물을 터뜨리는 범위가 조금 좁아지긴 했다. 왜 하필 또 아빠 얘기냐고 원망스러워하면서도 드라마를 아예 관둬버리는 일은 이제 잘 없다. 예전엔 무조건 엉엉 울었다면 이제는 흑흑이나 또르륵 정도로 끝날 때가 많기도 하고.


어쩌면 빨간약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 아물었는 줄로만 알았는데, 예고도 없이 닿아 온 빨간약에 상처가 다시 따가워 놀랍고 또 서러운 마음. 그러나 나도 모르는 새 계속 그렇게 조금씩 약을 발라준 탓으로 저번보다는 이번이 조금 덜 따가운. 완전히 무감해지는 날은 오지 않겠지만, 매번 손톱만큼이나마 나아지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는.


그래, 인간은 결국 그래서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지. 내 아픔이 그대로 고여 어딘가 썩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여러모로 변주된 이야기를 감싸 안으며 그것으로 나를 달래는. 병이라고는 암밖에 모르는 드라마 작가들 다 짜증 난다며 꽥꽥거리던 때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오늘도 나는 드라마를 본다. 언제 따가울지 몰라 반쯤은 긴장한 채로도, 혼자서도 씩씩하고 용감하게. 그러니 확실해 아빠. 나는 아직 자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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