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일이다. 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떠났다. 앞으로 일주일 간 학교는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를 것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수능이지만 올해는 그 긴장감이 유독 더하다. 지금껏 코로나와 잘 싸워왔지만 마지막 남은 수능 전을 무사히 치러내야 한다. 물론 우리는 그 어렵다는 걸 또 해내는 대한민국을 보게 될 테지만.
요 며칠 아이들과 함께 교실 대청소를 했다. 봉사시간은 아이들이 가져가는데 왜 이선생의 삭신이 쑤셔야 하는지 모르겠다. 벽화를 남기던 후손 아니랄까 봐 아이들은 깨알같이 벽에 낙서를 해놓았다. 낙서 몇 글자에 인간의 숨겨진 모든 욕망이 보여 이 선생은 피식 웃는다. 사랑에 대한 갈망(철수 하트 영희), 동료에 대한 질투와 비난(누구누구 븅신, 멍청이),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약속(우리 성공해서 만나자)... 그러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어느 시대 화석인지 납작하게 붙어버린 껌딱지들이 눈에 띈다. 한숨만 유발하는 교실을 둘러보며 이 선생은 올해도 어김없이 수능이 다가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데 아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시간을 들여서 청소를 하는지 도통 이해를 못하고 있다. 지우개로, 아세톤으로, 손 소독제로 열심히 문질러도 낙서가 지워지지 않아 이 선생은 절망 중인데 학급 회장이란 녀석이 능청스럽게 한마디 한다. "아유 선생님, 그런 작은 글씨까지 누가 본다고 그래요. 아무도 안 봐요 안 봐." 아무 생각 없는 이 아이들에게 매뉴얼 7 페이지 밑줄 친 부분을 들이밀 수도 없고 조용히 한 마디 할 뿐이다. 자기 책상 위에 낙서 있는 놈은 집에 못 간다..
사물함을 비우기까지 여러 날이 걸렸다. 책상 서랍 속과 사물함을 모두 비우라 하니 아이들은 세상 난센스라는 듯 의아해한다. '아니 선생님, 책상 속 물건을 비우라면서요. 그럼 사물함에 넣어놔야 하는데 사물함 비우면 어디에 보관해요?' 외국어도 아닌데 소통하는 게 이렇게 힘들다. 집으로 모두 가져가라는 말에 세상 불평불만을 다 쏟아내는 아이들. 하긴 핸드폰 하나, 화장품 파우치 하나 찔러 넣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의 가방 속을 그 많은 책과 노트로 채우라는 건 너무 생경한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옛날에 말이야.. 누군가 사물함에 알람 시계를 넣어 놓고 자물쇠로 잠그고 갔는데 수능 시험 중에 울렸다는 슬픈 전설이 있어.. 그 이후로 우리는 사물함을 무조건 비우게 되었단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알람 인간에게 분노를 표출하고는 사물함을 비워주었다.
해마다 11월이 되면 교사들에겐 한시적이지만 수능 감독관이라는 직업이 하나 더 생긴다. 지켜야 할 것도, 조심해야 할 것도 수십 가지이고 무엇보다 수능 시험장을 준비하면서 이미 육체적, 정신적 피곤함을 경험한다. 올해는 특히 코로나와 함께 치르는 수능인지라 감독관이 혹시라도 몸이 아프거나 최악의 경우 확진자가 된다면 대역죄인이 될 분위기이다. 내 몸이 공공재가 된 느낌이다. 학교는 학생들이 온라인 수업을 하는 일주일 동안 교사들에게 교문 밖 봉쇄령을 내렸고 수능 감독관 행동강령 메시지만 벌써 몇 번째 전달 중이다. 3년 전 지진 발생 때처럼 외부의 물리적 변수라는 상황은 비슷하지만 대처하는 민감도는 훨씬 세다. 몇몇 교사들은 유증상자 시험실 감독관으로 배정되어 방호복을 입어야 하고 식사도 별도로 한다. 모든 게 살얼음판이다. 수능은 수험생과 학부모에게만 일생일대의 사건이 아닌 것이다. 전국의 수많은 수능 감독관과 각 부처 담당자들이 많은 시간 투자하고 노력하고 힘을 모아서 기적처럼 치러내는 대한민국 유일무이 인륜지대사이다.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결속되어 그 결과가 단 하루에 응집된 에너지로 문제없이 발산될 때 우리는 비로소 올해 수능도 무사히 끝났구나 안도할 수 있다. 그렇게 십수 년 피곤하고 지치는 경험을 반복하면서도 다시 한번 대한민국 참 대단하다고 감탄해마지 않을 그 날이 또 오고 있다. 수험생들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