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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미니 Nov 20. 2020

흡연 일상(feat. no 마스크)

매일 아침 8시 56분. 거리두기 캠페인 송이 학교 안에 울려 퍼진다. 몇 달째 반복되는 익숙한 멜로디를 따라 부르며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선다. "선생님, 이 노래 너무 좋지 않아요? 목소리 너무 달달하죠..." "얘들아 음악 감상 시간이 아니야. 가사를 잘 새겨들어야지." "그럼요 선생님. 저 마스크 잘 쓰고 있잖아요." "그래그래. 잘하고 있다.." 청소년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장면은 여기까지이다. 

이 선생은 올해 1학년 네 개 반을 맡아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신기한 것은 사람마다 인격이 다르듯이 수업에 들어가는 네 반도 저마다 다른 고유의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반은 흥이 많아 수업이 즐겁고 또 어떤 반은 반응이 1도 없어서 진땀을 뺀다. 그리고 여기 유독 무거운 발걸음으로 앞 문을 열게 되는 그런 반이 있다. 오늘도 K군은 노 마스크로 앉아 있다. K 말고도 L, S, P, H.. 늘 그놈이 그놈이다. "답답해요" "귀가 아파요" "숨 쉬기 불편해요" 이유는 매번 똑같다. 모두가 다 불편하다고, 서로를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거라고 정색하고 지도하면 잠시나마 마스크를 쓰는 시늉을 하지만 얼마 못 가는 모양이다. 다음 수업 교과 선생님도 이 선생과 똑같은 고충을 토로하는 걸 보면. 


얼마 전 마스크 미착용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버스기사를 때린 승객의 이야기가 크게 보도되었다. 사람들은 상식 이하의 행동에 분개하며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렇게 민감한 시대에 타인뿐 아니라 자신도 망칠 수 있는 행동을 왜 하는 것인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질병과 생명에 관계된 것인 만큼 사람들의 예민한 대응과 반응이 과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좀 다른 상황이 연출된다. '미성년자'와 '교육'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는 맹목적인 비난과 강제성을 동원하기 힘들다. 지도하고 다독이고 설득하여 성장과 성숙을 끌어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지난하고 질기다. 우리도 과태료를 물읍시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해요. 이기주의로 남에게 피해 주는 행동은 고쳐야죠.. 회의 때마다 선생님들의 볼멘소리가 나오지만 결국엔 학교란 무엇인가, 교육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등의 겉도는 이야기들만 설왕설래하다가 다시 한번 지도하고 다독이고 설득해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지난 몇 달간 이 선생은 두통과 스트레스에 미간 펼 날이 없다. 디귿 자로 이어진 건물 각 층 사각지대에 출몰하는 애연가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코로나 때문에 학년별 점심시간이 달라지면서 애연가들의 활동영역은 더 넓어지고 행동은 더 대담해졌다.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에 화가 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람이 부는 쪽으로 달려가 본다. 코끝에 흔적만 남긴 채 현대판 홍길동들은 홀연히 사라지고 없다. 3교시가 끝나면 어김없이 금연교육 송이 또 울려 퍼진다. 안돼 안돼 담배연기~~~~ 담배 피우지 않겠다고 소리쳐봐. 이렇게 매일 캠페인 송을 들으면 0.001%의 효과라도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자율활동 시간에 금연교육 캠페인 영상을 보여주고 등굣길에 금연 캠페인을 하면 어느 날 갑자기 아.. 담배는 나쁜 것이니 끊어야겠다..라는 생각이 한 번이라도 들게 될까. 언젠가 옆자리 흡연가 김 선생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담배 처음 시작한 게 언제예요?" "아.. 고 1 때?" "왜 피게 된 거예요?" "음.. 그냥 친구들이 피니까. 자연스럽게.. "  그렇다. 아이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게 된다. 그 시기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다. 학. 창. 시. 절. 아이들은 학교에서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나가서 피면 되니까. 건강에 해롭다고 백날 외쳐본들 돌도 씹을 나이에 솔깃할 말이기나 하냔 말이다. 


화장실에 들어간 한 무리가 남자 선생님과 실랑이를 하고 있다. "담배 안 폈다고요. 안 폈다는데 왜 흡연측정을 해요!"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나더니 학생 하나가 씩씩거리며 보건실로 향한다. 이 선생이 무거운 마음으로 앞 문을 여는 바로 그 반의 학생이다. 흡연 지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욱하는 마음에 주먹으로 유리창을 깬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어느 심리학자가 멋지게 표현한 이 단어가 학교에서는 기물파손과 학교폭력과 교권침해의 현장에서 발현된다. 오랜 시간 학교현장에서 별의별 일을 겪다 보니 교육이라는 것에 신물이 나고 회의감이 들 때가 있다. 결국은 강력한 규율과 처벌만이 답인 건가.. 90년대에 히트했던 시스터 액트나 위험한 아이들처럼 한 명의 참 교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영화적 상상은 판타지에 가깝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교육이라는 것에 낭만을 부여하는 듯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교육은 인내와 인고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느리고 더디고 눈앞에 보이는 효과도 없다. 당장의 변화를 원한다면 특효약은 따로 있다. 교육은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지치고 답답하고 지난해도 결국 또다시 지도하고 다독이고 설득하는 것. 오늘도 이 선생은 짜증과 화를 고이 접어 갈비뼈 아래로 아래로 구겨 넣고 애증의 전쟁터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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