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본업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려고 한다.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근무한 지 벌써 3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문계와 특성화가 불편하게 동거하는 종합고등학교에서 근무한 지 3년이 되었다. 그간의 세월은 솔직히 존.버.였다. 영어는 쳐다보기도 싫다는 아이들에게 그림인지 상형문자인지도 모를 영단어를 설명하느라 애쓰면서 자괴감과 분노, 허탈감, 아주 가끔씩 맛보는 성취감이 뒤섞여 눈물의 대환장 파티를 하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기억 너머의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간의 경력과 스킬로도 커버하기 힘들었던 수많은 실패담으로 얼룩진 지난날들이 내 인생에서 꼭 필요한 시간이었는지 곱씹어보자면 덕분에 겸손과 인내를 배우고 아픔 속에서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정도로 미화할 수 있겠다. 혹자는 인정 못하겠지만 학교에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다. 일타강사처럼 수업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력이 하찮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르치는 일 말고도 각양각색의 아이들을 상대하는 버거움은 공교육을 책임지는 우리 교사의 몫이다. 그 각양각색이라는 것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고 깊은지에 따라 교사는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인생에 대단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성취감에 도취되기도 한다. 나 역시 부족하지만 지금껏 나름의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학교와 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이 학교에서의 생활이 유독 힘들었던 이유는 특성화 고등학교의 구조적 한계와 모순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학생과 교사 모두 자신들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현실을 묵묵히 감내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소수의 마에스터고를 제외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가 차원의 장기적인 혁신과 함께 대대적인 투자와 엄청난 지원이 있다면 모를까. 무기력한 학생들을 지켜보면서 달라지지 않는 현실에 한숨짓고 상처받는 동안 내가 받은 가장 슬픈 위로는 너무 애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일개 교사 나부랭이가 고민한다고 해결될 사이즈가 아니잖아. 주어진 역할만 충실히 하면 그걸로 충분해.
주말 조조영화를 선택한 것은 일종의 죄책감과 의무감이 빚어낸 결과였다. 영화관에서 제일 작은 규모. 나를 포함해 3명밖에 되지 않는 관객이 함께 한 영화. 다음 소희였다. 한 특성화 고등학교 출신의 여학생이 현장 실습 파견 중에 겪게 되는 일들을 그렸다. 중반까지는 주인공 소희의 시선으로, 뒷부분은 사건을 맡은 경찰 유진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경찰이 등장한다는 것은 영화가 핑크빛 청소년 성장 드라마가 아니라 시사성 짙은 사회 고발 드라마임을 예상하게 한다. 영화는 유진이 사건을 파헤칠수록 고름처럼 흘러나오는 불편한 진실. 현장 실습이라는 것이 사실은 대학병원 인턴과 같은 도제 시스템이 아니라 일 년 간 90% 이상이 퇴사를 하는 대기업 하청의 하청의 또 다른 하청 업체가 운영하는 고객 응대 콜 센터에 실습생들을 대체제로 투입하고 있다는 것.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지금 우리 사회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영화 속 현실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세계가 아니다. 현장 실습과 관련된 고질적인 악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나. 관련된 사건 사고가 생길 때마다 대기업과 하청으로 대변되는 갑을 관계, 취업률이 생명줄인 학교와 예산을 무기로 암묵적인 경쟁을 독려하는 교육청, 울부짖는 사회적 약자의 분노. 이 익숙한 알고리즘이 무한반복되는 현실에서 우리 사회는 어떤 노력을 해 왔던가.
영화 종반부에 유진이 교육청 담당자를 문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화가 나는 장면인데 나는 오히려 울컥하고 말았다. 일개 지역 교육청 장학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며, 니가 뭘 안다고 나를 비난하냐는 듯이 매섭게 노려보던 그 눈빛을 마주하고 있자니 습관 속에 박혀있던 '일개 OO이' 뭘 할 수 있겠냐고 스스로를 애써 깎아내리며 합리화하던 나 자신을 만나게 된다. 니가 아무리 애써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느끼고 흡수해 왔다. 우리가 시스템이라고 치부하는 그 수많은 제도와 구조가 사실은 얼마나 모순적이고 잔인하게 견고한 성을 이루고 있는지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은 을들의 치열한 전투장이니까. 을이 을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을이 을에게 비굴해지며, 을이 을을 밟아야 성공하는 투쟁의 현장은 열아홉의 소희가 실습하기에는 너무도 버겁고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소희와 조금이라도 관계 맺기를 했던 어른들은 모두 책임을 회피하고 남탓하기 바쁘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에 내던져진 10대 소녀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욱하는 성질머리, 자해 이력, 폭력성 등이 추가될 때마다 '소희는 이런 아이'로 낙인찍혀 그녀를 평가절하하는 데이터로 활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왜'가 빠져있다. 이야기 속 맥락. 왜 그런 행동이 나왔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짐작하고 넘겨짚고 단정해버린다. 세상을 좀 더 많이 경험한 관점을 내세우면서. 사실 이 부분에서 나 또한 다르지 않음을 고백한다.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을 범주화하고 성향을 분류해서 나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한 적이 많았다. 특히 이 학교에 와서 극단적인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아이들을 상대할 때마다 '도무지 나는 저 아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기를 여러 번. 사실은 이해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으면서. 부끄럽다. 반성은 늘 저질러 놓은 나의 과오를 직면하는 일.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접점이 없던 제삼자 유진만이 소희의 아픔에 공감하며 진실에 다가간다. 참으로 묘한 지점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친한 동료 교사에게 연락을 했다. 취업 업무를 담당했던 그녀는 늘 바쁘게 움직였는데 어디 가냐고 물을 때마다 거래처에 출장 간다고 했었다. 현장 실습처에 학생을 보내기 위해, 보낸 학생이 잘 지내는지 확인하기 위해, 새로운 거래처에 학교 홍보를 하기 위해 그녀는 항상 동분서주했다.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었고 그녀는 늘 진심이었다. "교사야 영업사원이야" 농담처럼 건넸던 말들을 떠올려본다. 영화가 현실이고 현실이 영화 같은 지금, 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본다. 내가 진짜 어른이 된다면, 나처럼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일개 개인들이 많아진다면 그래도 조금은 희망이 보일 것 같다. 좋은 영화였다. 여전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춘다. 어떤 어른으로 살고 싶은지 오늘 밤 곰곰히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