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저녁의 흔한 장면.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안돼. 학교 가."
"아.. 안 가면 안돼?"
"그럼... 애들은 어떡하니.. 네가 선생인데.."
학교.. 가기 싫지만 떠날 수도 없는 곳.
학교 같이 보이는 이 건물은 사실은 교도소이다. 그러나 학교라도 한들 이질감이 전혀 없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는 말이 찰떡이다. 획일화된 공간 구조와 단체 생활에 최적화된 각종 규율과 규칙들 속에 갇힌 이들은 일탈과 자유를 갈망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학교만 오면 집에 가고 싶어 하고, 규칙과 의무 앞에서 자신들의 자유가 꽤나 억압받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전면 등교가 선언되던 날, 설마 했던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자 상당수의 아이들은 실망했고 상황은 다시 바뀔 거라며 현실을 부정했다. 의무교육과 졸업장을 이유로 억지로 학교를 다니던 이들에게 코로나는 귀찮게 학교를 가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주었고, 학교는 점점 더 가기 싫은 곳이 되어 버렸다. 어떤 이들은 학교가 곧 사라질 거라고도 한다. 학교는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
오래전부터 학교는 표준화된 공교육의 상징으로 기능해왔다. 전교생이 천명이라면 천 개의 교육과정이 실현되어야 마땅하지만 그동안 우리 교육은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자원,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여 산업 사회에 인적 자원을 공급해왔다. 그나마 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라는 펜데믹이 우리의 일상을 바꿔 놓으면서 지지부진했던 미래교육의 담론들이 동력을 얻고 있는 모습이다. 크게 보면 앞으로 학교는 교육과정, 공간, 기술 이 세 가지 측면에서 변화를 겪을 것이다. 학생이 원하는 수업을 선택하여 짜여진 개인 시간표에 따라 교육과정이 운영되고 학교 외에도 다양한 학습 공간이 지원되며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에듀테크 환경 또한 안정적으로 구축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교육이 온전히 우리 일상에 보편화되기까지 우리는 그 변화의 과정 중에 감당해야 할 불편들을 기꺼이 감수하고 인내해야 한다. 여전히 학교에는 변화에 저항하는 이들이 많다.
저 가정학습 쓸래요
코로나 장기화로 결석을 하고도 출석을 인정받는 체험학습 인정 기간이 20일에서 40일로 확대되었다. 여기에 체험이 아닌 가정에서의 공부를 이유로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연간 57일까지 출석을 인정해준다. 전염병에 예민하거나 취약한 학생들을 위해 꼭 필요한 제도이지만 실제로는 학교에 가기 싫은 상당수 학생들이 합법적으로 결석할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수능이 끝난 고 3은 일찌감치 가정학습에 들어갔고 학기가 끝나가는 다른 학년에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는 중이다. 시험이 끝나면 더 이상 진도라는 것에 구애받지 않으니 굳이 학교에 나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오기까지 성적 처리와 행정상의 이유로 학생들을 그저 붙잡아두는 불편한 진실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이 기간 동안 아이들은 하는 일 없이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고 하고, 교사들은 수업을 준비해 가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아이들이 문제라고 한다. 나 역시 미술 선생님과 함께 야심 차게 준비한 수업을 강행하려다가 아이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준비한 4차시 수업의 절반 이상을 날리고 말았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이미 그렇게 길들여져 있다. 그렇게 법정 수업일수는 또 채워지고 있다.
아이들에게 원하는 시간표를 짜 보게 했다. 어떤 아이는 하루 전체를 체육으로 채우고, 또 어떤 아이는 피아노, 음악 감상, 필라테스 등 취미 계획표를 작성한다. 분명한 것은 국영수는 모두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싫어하는 것은 만고의 진리겠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공부에 관심이 없다. 학교에 와서 즐겁게 놀고 편하게 있다가 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급식이 맛있으면 행복하고 핸드폰을 쥐어주면 더 행복하다. 그래서 방학 전까지 남은 한 주 동안 실험적인 시간표를 운영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활동 위주로 시간표를 다시 짜 보니 체육관과 음악실, 컴퓨터실 수업이 다수를 차지한다. 누가 봐도 놀기 위함인데 그래도 강행해 본다. 새로운 시간표를 들이밀자 가정학습을 신청했던 아이들이 하나 둘 취소하겠다고 한다. 교육적 의미를 떠나서 한번 해볼 만한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일주일이지만 아이들에게 오고 싶은 학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또래와의 사회성을 꼭 학교에서만 배울 필요는 없다. 지식 전달은 학교 공간에서만 가능한게 아니다. 기존의 학교 문법으로는 더이상 학교에 갈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학교를 가야 하는 이유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