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는 수능이, 하루 전에는 임용고사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가슴 졸이는 하루,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을 것이다. 나 또한 오래전이지만 미래가 불투명하던 그 시기에 오로지 합격만을 생각하며 영혼까지 끌어모았을 그런 날이었다. 영어가 재미있고 하다 보니 잘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니 자연스럽게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지만 교사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언어를 전공한 사람들은 안다. 통역과 가르치는 일 외에 생각보다 전공을 살릴 직업이 많지 않다는 것을. 어쨌든 영어를 가르치는 일에는 교육이 포함되기 때문에 누군가의 인생에 좋든 싫든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만큼 책임감과 선한 영향력에 대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nglish fever가 대한민국을 덮치던 2000년대 초반에는 영어가 대세였고 수능 과목에서 절대평가로 전환되기 전까지 영어교과는 소위 말하는 주요 과목이라 불리며 학교 수업에서도 영향력이 꽤 있었다. 정시가 강조되던 시대에는 수능 영어라는 이름으로, 수시가 대세가 되면 내신영어로서 오랫동안 입시 과목의 도구로 기능해 온 것이 대한민국 영어 교과이다. 누가 정해놓은 건지도 불분명한 수능 영단어 8,000개를 외우느라 학생들은 워드 마스터, 보카 OO 등을 끼고 살았다. 나 역시 어휘 지식이 많아야 독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단어 암기는 필수라고 끊임없이 조언했다. EBS 수능특강은 전국 수험생의 교과서가 된 지 오래다. 우리말 해설지를 이해하는 게 더 어려워서 해설지의 내용을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다시 설명하는 웃지 못할 순간들도 더러 있었다. 대학 입시를 앞둔 최종 관문이 이렇게 어렵다 보니 영어교육의 양극화는 불가피한 결과라고 본다. 수포자보다야 못하지만 영포자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과연 이런 현상이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로 전환되었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얼마 전 정년을 3년 앞둔 영어과 선배 교사가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흔치 않은 영국식 발음과 어휘력, 오랜 유학생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유와 낭만 등 배울게 많고 멋있는 그런 분이었다. 평교사로서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선생님을 보면서 나이 들면 외면당한다는 영어 교사의 국룰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었다. 그런 그가 남긴 한마디는 수업이 더 이상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재미는 곧 의미이고 보람이다. 앞으로 도구 교과로서의 한계는 더 부각될 것이다. 검색만 하면 1초 만에 번역과 음성지원이 되는 디지털 시대에 학생들은 점점 단어와 문법, 어려운 독해 지문에서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제2의 모국어로 사용하는 엘리트주의자들은 여전히 양성되겠지만 굳이 공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영포자 또한 더 많이 생겨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흐름은 개별 교사의 노력과 희생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15년 전만 해도 말하기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각 학교에 원어민 강사가 대거 투입되었다가 몇 년 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모둠 수업을 통한 협동학습과 프로젝트 수업이 한참 강조되더니 코로나가 터지고 온라인 수업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시대는 계속 변해도 입시는 여전히 굳건하다. 교사만 타성에 젖은 것이 아니라 학생들도 변화에 둔감하다. 무엇을 시도해도 종착역은 늘 같기 때문이다.
요즘 영어교사로서의 나 자신을 자주 돌아보게 된다. 20년 가까이 나름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나 역시 요즘 수업이 재미가 없다. 미래교육을 논하는 전문가들은 가르치는 일이 더 이상 교사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도록 학습을 안내하고 코칭하는 역할로의 변화를 받아들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성찰하고 고민한다. 그러나 여전히 정체성이 흔들린다. 미래 사회는 어느 때보다 학생의 주도성을 강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무기력해 보인다. 그 어떤 활동보다 핸드폰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들을 보면서 시대가 변한 것은 분명히 맞는데 이게 맞게 가고 있는 건지 혼란스럽다. 선배교사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었는데 이렇게 답을 못 찾고 표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