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 전병근 작가님과의 만남 (버찌책방)
“왜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잠시 머물러 본다.
지식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 경험해 볼 수 없는 세상의 간접 경험을 위해, 문해력을 향상하고자, 그리고 책 읽기 자체가 즐거우니까.
그래 즐거움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늘 책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책과 가까울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엄마가 서점이나 도서관에 자주 데려갔었던가? 아니면 우리 집에 책이 많았었나? 둘 다 아니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나가야 학교에 도착하는 시골에서 자랐고 부모님은 장남도 아니지만 할머니 할아버님을 모시고 살며
이웃에도 사촌, 또 그 이웃에도 먼 친척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자랐다. 나에게는 좋은 환경이었을지 몰라도 엄마에게는 고단한 환경이었을 것이다.
삼시세끼 식사 준비를 해서 따뜻한 밥을 차려드려야 하는 아주 까다랍고 예민한 할아버지가 계셨고 큰 살림을 혼자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그 고단한 하루가 마무리된 저녁이면 누런색 소포봉투로 포장한 책을 보시곤 하셨다.
식구들이 모두 물러간 밥상에서 보시기도 하셨고, 누워서 책장을 넘기다 스르륵 주무시기도 했다.
그럼 우리는 “엄마, 얼른 들어가서 자.” 하며 고단한 엄마의 잠을 깨우곤 했다.
’ 피곤하면 그냥 들어가서 자면 되지. 어차피 몇 장 못 보다 잠들 텐데…‘ 그런데 이제야 알겠다.
엄마의 책 읽기는 자신의 지친 마음과 몸을 돌보는 돌봄의 읽기였던 것이다.
나의 흥미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들 가운데에서도 나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아마 책 읽기가 아니었을까?
그 시간을 통해 엄마는 온통 날카로운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다정한 마음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엄마의 책 읽기가 돌봄의 읽기였기 때문에 엄마를 좋은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던 것이라 믿는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결국 나를 독서의 대물림으로 이끌었다.
토요일 오후. ‘버찌책방’에서 전병근 작가님과의 만남이 있었다.
미리 작가님이 쓰신 책 ‘읽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을 읽고 만남을 기다렸다.
나의 예상대로라면 아이는 신랑에게 부탁하고 조용히 다녀오면 될 것이었다. 다음날 출국을 해야 해서 가방을 싸고 집도 치우고 내 손이 움직여야지만 가능한 일들이 쌓여있었지만 잠시 멈추고 다녀올 셈이었다. 그런데 신랑이 출근을 한다고 한다. 이번 주 내내 새벽에 나가 자정이 되어 돌아오던 사람이었기에 어쩌면 예견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번에는 얼마나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준비했는데… 그런데 참 다행인 것은, 버찌 책방지기님께서 아이와 함께 올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한 시간 반쯤은 아이도 잘 기다릴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 시간 동안 아이가 읽을 책을 준비해서 함께 했다. (이후 북토크의 깊이가 깊어져 3시간이 다 되어 끝이 났고 아이는 살짝 눈동자가 흔들리는 듯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잘 이겨냈다. 고맙다 아들아)
나는 돌봄의 읽기 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어린이, 성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교사이지만 때로는 상황에 따라 통역가, 번역가도 되어 주어야 하고
자동차 영업도 해야 한다. 언젠가 보호자 한 분이 저녁 늦은 시간 다음날 도움을 요청하셨다. “선생님 내일 저 좀 만나주면 안 돼요? 도움이 필요해요.”
도움이 필요한 것이 뭘까? 민원일까? 학교나 나의 학급 운영에 불만이 있으신 걸까? 여러 생각이 스쳤다.
다음날 나를 보며 반갑게 뛰어오는 어머니의 손에는 자동차 판매 홍보지와 계약서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 나 이거 차 살 건데. 뭐라고 쓰여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좀 알려줄 수 있어요? “
“ 자동차요? 하하하. 알겠어요 어머니. 도와달라는 게 이것이었어요? ”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머리를 맞대고 마주 앉아 열심히 홍보지의 내용을 살피고
계약서를 살피고 칸에 내용이 맞게 기록되어 있는지 혹시 너무 부당한 내용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내가 잘 모르는 내용,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자동차 박사 동생에게 확인도 했다.
마지막으로 자동차를 판매하신 분께 전화를 걸어 어떤 서비스를 해 주는지도 꼼꼼히 확인해서 어머니께 다시 안내해 드렸다.
“선생님 진짜 고마워요. 나 이거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데 누구한테 물어볼 수 없어서 연락했어요.”
“잘하셨어요 어머니. 대신 나중에 새 차 나오면 저 한 바퀴 태어주서야 해요.” 하며 나의 자동차 영업 도움도 마무리했다.
내가 봐도 홍보지와 계약서에 쓰인 말들은 정말 어려운 단어들이다. 내가 이 분야에 관심이 없어서 일수도 있지만 더 쉽게 쓸 수 있는 단어들도 있을 텐데 모두를 위한 자료로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내가 원하는 것, 주고 싶은 것을 주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읽고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쓰는 더 필요할 것이다.
결국 이것이 돌봄의 읽기가 꼭 필요한 장면 아닐까?
지금 우리는 읽기를 통해 돌보는 눈을, 보살피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233)
‘김밥 싸서 가는’ 소풍의 추억 (책 242쪽)
‘고래먼지’에 나오는 스틸 도시락 속 김밥은 디지털 환경 속 아날로그 인간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 같다.
김밥 싸서 함께 밖으로 놀러 가는 것. 행복이란 그런 소풍 같은 것 아닌가. (243)
작년 체험학습날의 기억이다 어느 때처럼 가정통신문으로 체험학습에 대해 안내했다.
일하느라 바쁜 힘찬이 어머니께는 특별히 전화로 “어머니, 내일 체험학습 가요. 가정통신문 확인해 보세요.”라고 전화로 한번 더 안내를 했다.
가정통신문에는 ‘중식 제공’이라는 문구로 안내를 했다. 체험학습 당일 힘찬이가 신나게 “선생님 김밥 싸왔어요.” 하며 도시락을 보여준다.
“김밥? 점심 학교에서 준비한다고 했는데. 김밥을 싸왔어?” 무더운 여름날이었기에 김밥은 상할 수가 있어서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도시락을 준비했다고 한다.
농번기라 아침에 다른 도시락 준비하는 것도 힘들 것 같아 친절하게 학교에서 점심까지 준비하기로 했던 것인데 왜 준비하셨을까?
교실에 그냥 두고 갈 수도, 가져가면 분명 바로 상할 것이 뻔해서 마침 아침을 안 먹고 아이들과 김밥을 함께 먹고 출발했다.
“와! 최고다. 집에서 싼 김밥을 먹다니.”
그리고 뒤늦게 알았다. 이주배경 가정인 힘찬이 어머니에게 ‘중식 제공’이라는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고, 통신문 어디에도 점심이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았으니
한국에선 소풍 때 늘 김밥을 준비한다고 이웃 언니들에게 배웠기에 배운 대로 한 것이다. 그 사정을 알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학교에서 점심을 계획한 것도, 다시 한번 확인 차 전화로 체험학습을 안내한 것까지는 훌륭했는데 조금 더 세심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 김밥 저 싸준 거라고 생각하고 제가 맛있게 먹었어요. 괜찮쥬? “ 하며 민망해하는 힘찬이 어머니의 마음을 살짝 보듬어 드렸을 뿐이다.
굳이 어려운 말로 쓸 필요가 없는 것인데 왜 그랬을까?
분명하게 배운 것이 있다면 내가 아는 단어, 문장이 아닌 그것을 받아 볼 우리 반 보호자들의 언어로 써야 한다.
작가님은 책을 읽는 궁극의 목적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함이라 하셨다. 정말 멋진 말이다. 내가 책을 읽으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읽은 것을 필요로 하는 세상, 사람과 잘 연결시켜 줄 때일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을 나누는 기쁨이 읽는 힘에서 나오고 그것을 통해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
수업을 통해 앎과 삶을 연결한다고 하는 것이 나의 삶의 장면들에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읽는 사람이며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읽기를 통해 연결된 세상을 더 적극적으로 바라보고 관찰하며 그것에 애정을 갖고 쓰고 싶다.
그렇다면 나의 쓰기는 돌봄의 쓰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돌봐야 할 것이 많다. 나의 몸과 마음이 있고, 주변 이웃이 있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있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멸종위기종이 있고, 이 모든 것들의 거처인 지구가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233)
우리의 북토 크는 3시간 가까이 이루어져 해가 지고 있었다
자연에 대한 체험이 감각을 깨우고 그것이 돌봄의 읽기와 쓰기의 삶으로 이끈다는 작가님의 이야기처럼,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며 오늘 이 시간에 나눈 것들이 그저 좋았다는 감각으로 머물고 끝나는 것이 아닌
아침이 되면 다시 떠오르고 피어날 내일의 해처럼 다가올 나의 삶으로 연결되기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