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 벌러덩 누워 어제 책모임에서 나눈 책을 펼쳤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산문).
새롭게 시작한 책모임에서 함께 읽고 토요일 아침 버찌 책방에 모여 함께 나누었다.
서로의 시선이 오고 간 것을 나누며 슬픔과 기쁨이 오고 갔고 그 안에 감격과 눈물로 채우기도 했다.
읽었던 책을 함께 모여 나누고, 돌아와 다시 펼치니 그 안의 문장과 단어들이 모임을 함께한 사람이 되어 오는 것 같다.
갑자기 내게 아주 커다란 ‘비빌 언덕’이 생긴 것 같다.
벌떡 일어나 핸드폰에 검색을 시작했다.
‘비빌 언덕’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는 미더운 대상’이라고 설명된다.
보살피다. 이끌다. 미덥다. 이것을 주는 대상. 그것이 바로 비빌 언덕이다.
아무것도 쓰지 않았던 3월이다.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쓰고 싶지 않던 3월이었다.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기록하던 내가 쓰고 싶지 않은 말과 글들이 엉켜있었다.
기억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고, 기록해 두어야 할 마음도 많았다.
그럼에도 쓰고 싶지 않고, 날려 보내고 싶은 날들이었다.
학교를 옮기고, 집을 이사하고, 아이가 전학을 했고, 새로운 성당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 안에서 새로운 만남들이 계속 이어졌다.
새로운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또 새로운 교실, 새 아이들과 만남을 갖고,
낯선 이웃들을 오고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난다.
신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또 낯선 사람과 마주 했다.
온통 새롭다고 해서 긴장이었던 것도 아니다.
되려 이렇게 편안하고 하루하루가 어쩜 이렇게 따뜻할까 싶게 충만함이 오고 가는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참 이상하다.
적절한 균형 속에서 날 것이 주는 신선한 마음들이 나에게 많이 오고 갔음에도 그것을 꽉 쥐기보다는 훌훌 날려버리고 싶었다.
잡고 싶지 않은 날들이었다.
새로운 교실에는 바라 볼 수록 아픔이 많아서 끌어안을 수도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는 이야기들이 떠다닌다.
안아 줄 수도 없고 밀어낼 수도 없는 시간들이 쌓여있다.
나는 그것들을 끌어안고 싶은 걸까? 밀어내고 싶은 걸까?
서로에게 비빌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이들은 나에게 서로 보살펴 주고 이끌어 주는 시간들이 쌓이면
그 조용한 마음들이 말이 되고,
그 말들이 다시 따뜻한 눈빛이 되어
마침내, 누구도 외롭지 않은 작은 언덕 하나가 생길 것이다.
그 언덕은 다정한 침묵으로 서로를 감싸고,
무너지는 마음을 가만히 기대게 하며,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유를 가르쳐줄 것이다.
다정하고 단단한 서로의 비빌 언덕을 하루 한 줌씩 쌓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