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보다 먼저, 삶이 다가온 시간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 연수를 다녀와서.

by 소화

2박 3일 전국초등국어교과모임(전국모) 연수는 언제나 그랬듯 악역 하나 없고, 긴장을 요구하는 장면도 없는 평화롭고 다정한 시간이었다.

마치 동화 속에서 “그렇게 사람들이 살았더래요.” 라는 문장이 계속 이어지는 세계에 잠시 들어가 있다가 나온 기분이었다.


연수를 떠나기 전날, 두 권의 책을 샀다.

한 권은 좋아하는 평소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쓰기에 관한 신간이었고,

다른 한 권은 이번 달 책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한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산문) 이다.

기다리던 작가님들의 책이어서 연수 중간중간 ‘돌아가면 빨리 책을 펼쳐야지’ 하는 설렘이

작은 예고처럼 마음에 스쳤다.


나는 글을 썼던 사람이 아니라 계속 쓰는 사람, 앞으로도 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이번 연수에서도 자연스럽게 글쓰기 분과를 신청했다.

내가 참여한 분과의 강사님은 『학교 소외』를 쓰신 차성욱 선생님이었다.


분과 연수가 끝난 뒤 은미가 물었다.

“언니, 어땠어?”

“음… 그냥 좋았어. 배웠다는 말로는 잘 안 전해져.”

“뭐가 좋았는데? 무슨 내용이었는데?”

“그 울림은 말로 옮길 수가 없어. 들어봐야 알아.”


정말 그랬다. 그 시간은 ‘배움’이라기보다

글에 대한 태도와 삶에 대한 신뢰가 목소리로 전해지는 순간에 가까웠다.

같은 공간에 있던 모두가 그 고요한 울림을 느꼈을 것이다.

혹시라도 깨질까 봐 서로의 숨소리마저 고르던 시간.


강의실 창가 너머로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보였다.

그 눈조차 이 시간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분명한 힘이 있었고, 우리를 조용히 글쓰기로 이끌고 있었다.


강의 중 추천해 주신 책 가운데

나는 『학교 소외』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을 연수가 끝나기 전 주문했다.

다음 주 책이 도착하면 어쩌면 다시 느슨해졌을 나의 글쓰기를 지금 이 간절한 감각으로 불러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집에 돌아와 며칠 만에 다시 모인 가족들과 떨어져 있던 시간을 진하게 나누고,

엄마의 빈자리로 내내 속상하다가 드디어 안정을 되찾은 아이에게

『삐삐 롱스타킹』을 읽어 주고 미안함을 대신했다.


모두가 잠든 뒤, 나도 조용히 책을 펼쳤다.

다시 타오른 글쓰기의 마음을 더 단단히 붙잡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미로 쌓이기보다 낱장 하나하나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책의 문장보다 연수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목소리와 말들이 귓가에 오래 남아 있었다.


나는 글을 신뢰하는 사람인데, 어쩌면 그보다 먼저 삶을 신뢰하는 태도를 보았기 때문이었을까.

결국 책을 중간쯤 덮고 말았다.

글쓰기에 관해서는 이미 더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진 시간을 보냈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그 좋았던 마음을 아직은 글로 꺼내기 어려웠다.

아침, 다시 책을 펼치는 일이 조금 두려웠다.

어제와 같은 마음이 또 반복될까 봐.


그래서 조용히 읽던 책을 미뤄두고

진은영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을 펼쳤다.

목차를 넘기며 이 책은 어떤 세계와 이어질까 생각했다.


그때, 반가운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밝은 방』.

이번 연수에서 주문한 바로 그 책이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책과 책이,

연수와 일상이, 내 삶 안에서 연결되고 있었다.

그 연결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다시 책의 세계로 한 걸음 들어갔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간은 읽는 기쁨을 잃은 시간이 아니라

글보다 먼저 삶을 통과하던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읽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시간이 아닌 앞으로 쓰게 될 글이 삶에서 만들어 지고 있는 시간일 것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울림 앞에서 나는 잠시 책을 덮었고,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이 쓰고 싶어졌다.


그날 강의실 창밖에 남아 있던 눈처럼, 아직 녹지 않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시간.

마치 자신의 작은 움직임조차 우리에게 방해가 될까 봐 숨을 고르고 있던 것처럼.


그 고요가 지나간 자리에

다시 책이 열리고, 다시 문장이 나를 부를 것이라는 걸.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읽고, 쓰는 사람으로 조심스럽게 이 삶을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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