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를 하며 콧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갑자기 한숨을 쉰다.
“아, 오늘 그러고 보니 금요일이네?”
“오늘 스파링하는 날이라 그렇지?”
“응 맞아. 힝.”
복싱학원에 다닌 지도 어느덧 네 달쯤. 일주일에 세 번 가는데, 금요일은 비슷한 체격의 아이들끼리 스파링을 하는 날이다. 처음엔 아이가 금요일을 기다렸다.
스파링이 그렇게 재미있다는 것이다.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형들은 알아서 맞아주는 역할을 했을 테고,
아이는 그 배려를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하며 신이 났다. 주먹이 세고 빠른 줄 알았다. 아이가 누리는 착각이었지만, 그 착각 덕분에 아이는 복싱을 배우는 것이 좋아졌다.
그러다 한 달 전, 금요일 저녁이었다.
띠띠띠띠—키패드 누르는 소리가 들려 “아들~” 하며 마중을 나갔는데, 아이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집까지 걸어오는 길이 채 5분도 안 되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넘어졌나, 아팠나, 무서운 형을 만났나 물어도 아이는 고개만 젓고 울기만 했다. 아픈 것도 아니라고 했다.
조금 진정이 된 뒤에야 이야기가 나왔다.
오늘 스파링에서 배를 세게 맞았단다. 자기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형이었다. 그만큼 힘 조절이 덜 되었을 것이다. 그건 이해가 갔다.
그런데 아이를 더 힘들게 한 건 따로 있었다. 그 형의 동생, 2학년짜리 아이가 옆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는 것.
아픈 것보다, 맞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게 더 창피했다는 말에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아이를 안아 주었다.
아이는 그날 ‘아픈 것’보다 ‘부끄러움’을 먼저 배웠다.
그날 이후 아이는 스파링이 싫다고 하여 금요일 대신 목요일로 학원 요일을 바꾸었다. 일주일에 세 번은 그대로 가되, 금요일만 피해 간다.
어느 날 관장님이 아이에게 물었단다.
“요즘 왜 금요일에 안 오니?”
아이는 아주 진지하게 대답했다.
“트라우마 때문에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과 나는 한참을 웃었다. 웃으면서도, 아이가 자기 마음을 이름 붙일 수 있게 된 게 조금 대견했다.
아이는 그 말을 제법 자연스럽게 쓴다. 스스로 ‘트라우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아마도 조금은 건너왔다는 뜻일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웃으며 돌아보게 되었을 때 쯤 아이에게 이야기 햇다.
네가 덜 맞았던 건, 네가 정말 강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너보다 선배였기 때문이라고.
힘이 센 사람은 세게 치는 사람이 아니라,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주먹을 덜 세게 날릴 수 있는 힘, 그게 진짜 힘이라고.
우리가 아이에게 운동을 가르치고 싶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말했다. 배려를 몸으로 배우길 바랐다고.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군가는 너보다 먼저 가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누군가는 너를 따라오는 사람이 될 거라고.
네가 그동안 맞았던 ‘덜 아픈 주먹들’을 떠올리라고 했다. 그건 실력이 아니라 배려였고, 존중이었고, 네가 보호받고 있었다는 증거였다고.
동생 앞에서 맞아서 부끄러웠다는 말은, 네가 이미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이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알고 있다는 뜻일것이다.
. 자존심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소중한 거라고. 다만 자존심은 이기는 것으로만 지켜지지 않는다고.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모습, 맞았을 때 도망치지 않고 자기 마음을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그날 이후 아이는 여전히 금요일을 조금 꺼리긴 하지만, 노골적으로 편애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아이도 알게 되겠지. 세게 치지 않아도 강할 수 있다는 것, 맞아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배려받았던 주먹을 기억하는 사람이 결국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나는 그걸 아이가 천천히, 자기 속도로 배워가면 좋겠다.
금요일을 건너는 방법도, 자존심을 지키는 방식도, 모두 아이의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