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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솔직히... 꿀 빠는 중이다

이 행복을 부정하지 않기로 한다 

요새 우리 집 최대 관심사는 바로 [흑백요리사]이다. 남들보다 뒤늦게 정주행을 시작했는데, 그런만큼 거의 매일 저녁 온 가족이 하루의 일정을 끝마친 후에 TV 앞에 모여 앉아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간혹 험한 말이 나와서 함께 보는 아이가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그런 것 정도로는 시청을 멈출 수 없을만큼 재미있고 흥미롭다. 

반면, 원래 정주행을 하던 [태어난 김에 음악일주]는 상대적으로 시들하다. 이래서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들이 경쟁 구도를 좋아하나 싶을만큼, 태어난 김에 음악일주는 좀 심심하게 느껴지고, 어차피 기안 84가 행복하게 음악 여행 하고 있을테니 당분간 그대로 내버려둬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흑백 요리사는 하루라도 빨리 이 긴장감 넘치는 경쟁을 내가 끝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얼른 봐버리자! 싶은 것이다. 


이것이 나만의 일은 아니었는지, 어느 날 아침 밥을 먹던 아이가 말했다. 


태어난 김에 음악일주는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프로그램인 것 같아. 예를 들면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집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들 같은. 



으잉? 이 말을 듣고 처음 든 내 생각은 바로 '으잉?'이었다. 지금 너, 내 얘기 하는거야? 



지난 번 글에서도 말했지만 현재 나는 백수다. 회사에 다닐 때에는 백수가 되면 미친 듯이 글만 써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그리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지금은 나 자신을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 


https://brunch.co.kr/@sohyang0311/51

그러니 아이의 저 말은 아무래도 나를 두고 한 말인 것 같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나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 아니야!' 라고 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도리어 역시나 좋아하는 프로그램인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를 변호했다. 


하지만 태어난 김에 세계 일주 역시 우리가 시간이 될 때마다 챙겨보던 프로그램이잖아. 엄마는 그 프로그램도 매우 좋아하고 있어. 시간이 많다고 해서 보고 있는 건 아냐. 


나의 이 말에 아이는 수긍을 했고 그때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내내 내 마음 끄트머리 한 쪽에 그 대화에 계속 묶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오후, 집에 돌아와 아이의 간식을 챙겨주면서 물었다. 


"토토래, 네가 생각하기에는 엄마가 아빠 출근하고, 너 학교 가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막 TV만 보고 놀고 있는 것 같아?" 

"아니." 


오호. 다행이다. 그래. 딸아. 엄마는 청소와 빨래는 물론이고 매일 매일 식단을 짜느라 머리가 아프단다. 그리고 이렇게 너에게 간식도 챙겨주고 있잖니? 


"엄마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어. 엄마는 시간 날 때마다 네모네모를 하잖아." 


헐.... 

(맞습니다. 최근 네모네모로직에 푹 빠져 있습니다.)


내가 네모네모로직을 하는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집 안에 있을 때 자투리 시간을 써서 몰입하기 좋기 때문에. 엄마로서, 아내로서 집안에 있다보면 무언가 오~래, 깊~이 몰입할 시간은 갖기 어렵다. 하지만 그 와중에 짬짬히 자투리 시간이 나는데, 그럴 때 보통은 휴대폰을 본다. 나는 그런 나의 습관이 싫었고 그러다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이 네모네모로직! 이것만 있으면 자투리 시간에도 머리를 쓰며(?)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 시작은 그렇게 하게 되었는데, 현재는 다양한 팟캐스트로 나름 지식과 정보를 쌓아가면서 네모네모로직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아이가 이 네모네모 로직이 '나의 일'이라고 생각할 줄은 몰랐다. 또 한 편으로는 '엄마는 고작 퍼즐을 할 뿐이잖아.' 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엄마는 고작 퍼즐을 할 뿐이잖아. 

그래서 다시 물었다. 


"토토래는 엄마가 집에서 하루종일 네모네모 로직하니까 부러워?"

"...응." 


응, 이라고 대답을 하는 아이의 얼굴에 나의 눈치를 보는 듯한 미소가 슬그머니 떠오른다. 아마도 '엄마 생각은 다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부러운 건 사실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때 잠시 나는 고민을 했다. 이런 아이에게 아니야, 사실 엄마는 네가 학교에 가고 나면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를 털어낸 다음, 빨래를 돌려 넣고, 설거지도 하고, 냉장고 정리도 한단다. 그리고 오후가 되면 너의 간식을 준비하고 저녁 메뉴도 생각해야 하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장도 봐야 하고. 그 와중에 심심치 않게 전화를 걸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너도 챙겨야 하지....'라고 말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네모네모 로직을 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원하는 드라마나 시리즈를 챙겨볼 시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건 내가 아주 좋아하는 일들이고, 그렇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마음껏 하고 있으니 그건 아이가 부러워할만하지 않은가. 


"맞아. 엄마는 지금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 이 시간을 통해 더 멋져져서 조만간 다시 일을 하는 게 엄마 목표야." 


나는 이렇게 말해버렸다. 그 결과 아이는 나를 네모네모를 하는 엄마, 로 기억하겠지만 그 또한 뭐 어떠랴 싶다. 일을 열심히 하고 자기계발을 열심히 하는 엄마도 멋있지만, 별 의미 없는 취미 생활을 뭐 저렇게 열심히 하나 싶은 인간이 하나 쯤 옆에 있어도 나쁠 것 없지 않을까. 




최근, 한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그리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아무런 목표없이 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아마도 돈이 되지 않을 취미들, 취향들을 탐닉하는 것. 아무래도 이것 역시 내 머리 속에서는 무언가 의미있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의미를 위해서라도 무의미는 필요하다. 


그리고 나의 욕심으로는 (아, 역시나 나는 TJ이다.) 그 무의미를 채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SNS나 유튜브이기 보다는, 나만의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방향이었으면 한다. 그 안에는 무의미하지만 재미있고 흥미로운 것들이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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