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너야 언제나

by 소현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어. 이곳의 주인공은 한 명이거든."

— 유미의 세포들




사랑을 오래 기다린 마음은 지나가는 풍경처럼 무심하게 보일 때가 많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인데 자주 울컥한다. 혼자 있는 일이 익숙해질수록 텅 빈 자리 하나가 더 뚜렷해진다. 늘 괜찮다고 넘기던 마음이 아무 이유 없이 조금 기운다. 좀 더 조용한 구석으로.


주변은 하나둘 짝을 이루고 혼자가 편하다고 믿었지만, 그 자유가 문득 고립처럼 느껴지는 밤이 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럴때면 고요함 속에 오래 감춰둔 감정들이 불쑥 그 자리를 차지한다. 어떤 마음은 급하게 누군가의 품을 찾고, 어떤 마음은 그 자리에 조용히 주저앉는다. 그게 사랑인지, 위로인지, 오래된 습관인지 모른 채 누군가 곁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 비슷한 이별과 상처를 반복하면서도 언제나 다른 기대를 품는 사람들.


“그것만 아니면 좋은 사람이야.”

친구는 이해하려는 얼굴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말이 길어지자,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빠져나갔다. 감정보다는 습관에 가까운 침묵만이 남았다. 말은 내게 닿았지만, 시선은 어딘가 멀리 가 있었다. 믿지 않으면서도 외워야만 했던 문장. 친구는 그 말을 이미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어본 사람 같았다.


그런 관계는 사람을 닳게 한다. 나도 그랬고, 곁에서 보았던 마음들도 그랬다. 상처가 하나둘 쌓이면서, 마음은 어느 순간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은 점점 ‘나는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인가 봐’라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 믿음이 자리를 잡으면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벗어나야 할 관계인데도 그 안에 머무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안에서라도 간신히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친구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거였다.


그 말을 들은 뒤, 마음이 자꾸 그 자리에 머물렀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까. 위로하고 싶었지만, 괜히 말 한마디가 더 아프게 할까 봐 꾹 참았다. 그냥 옆에 있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나도 그런 마음을 오래 감추며 지낸 적이 있어서 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만 조용히 중얼거렸다. 외로움은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고. 누군가를 바라보게 되는 마음, 말없이 곁을 바라는 마음, 그건 사람이 사람을 향해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그러니 그 마음 그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되풀이되는 관계와 상처의 밑바닥엔, 어쩌면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나를 덜어내는 쪽으로 살아오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의 내가 낯설어진다. 변화는 누군가의 말이나 충고보다, 자기 마음을 바라보게 되는 순간에 더 가까이 온다. 정확한 답보다 느리게 도착한 자각이 삶의 방향을 조금씩 바꿔놓는다. 자기를 들여다본다는 건 잘잘못을 따지는 일이 아니다. 그저 이렇게 말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땐 정말 애썼지.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사랑이 오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을 잃은 건 아니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마음을 잃었다고 말할 순 없으니까.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삶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일은 없다. 누군가가 오기 전에도 당신은 이미 주인공이었다. 그 모든 시간을 견디고, 마음을 지켜낸 사람은 언제나 당신이었으니까. 그러니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더 다정한 곳에 두었으면 좋겠다. 비워진 자리를 채우기보다, 그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던 자신을 기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