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보다 오래 남는 마음

by 소현

기억은 늘 흐른다. 어제의 빛나던 장면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자리가 닳아 흐려지고, 익숙했던 말은 낯선 목소리로 겹쳐온다. 잡아두려 애쓴 순간일수록 금세 손에서 흩어지고, 다 잊었다고 여긴 때에 오히려 낯선 모양으로 불쑥 되살아난다.




잦은 이사 끝에 이어진 전학들, 그중 가장 두려운 시간은 언제나 점심이었다. 수업 시간은 모두가 선생님을 바라보니 그 속에 섞여 있을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괜히 책상 서랍을 정리하거나 피곤한 척 엎드려 눈치를 피해 갔다. 하지만 밥을 먹는 순간만큼은 달랐다. 쟁반을 든 채 홀로 서 있는 그 짧은 시간이 끝없이 길게 느껴졌고,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만 같아 어깨가 굳었다.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 더 선명하게 느껴질 때, 한 친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같이 먹자.” 내 쟁반 위 반찬을 가리키며 묻던 말, “이거 좋아해?”라는 질문에 마음속 작은 틈이 열렸다. 쓸쓸했던 자리로 온기가 스며들었고, 그 온기는 소속감으로 이어졌다. 그 순간은 오래 남아 마음을 데웠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자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남겼다.


어릴 적,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돌봐주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나는 그분을 이모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엄마가 차려준 밥상은 거의 기억이 없지만, 이모님은 늘 내 끼니를 챙기고 곁에 앉아 말을 건네주었다. 혼자 밥을 먹는 시간이 잦았던 내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더 다정히 곁을 지켜주려는 마음이 전해졌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와 어울렸는지, 속상한 일은 없었는지 물으며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슬픈 날에는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말해주었고, 어린 내가 배워야 할 것들도 자연스레 알려주었다. 특히 내가 계란말이를 좋아한다는 걸 아시고는 종종 그것을 정성스레 만들어 밥상에 올려주셨다. 반듯하게 잘린 계란말이가 접시에 놓이면,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나를 향한 애정의 증표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얼굴조차 또렷이 떠오르지 않지만, 그 따뜻한 손길과 마음은 여전히 선명하다. 이모님은 언제나 나를 예뻐해 주셨고, 그 온기는 울음보다 깊은 위로가 되어 내 안에 남았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는 계란말이를 유난히 좋아한다.


내 기억은 단단하지가 않아서, 소중했던 순간들조차 이따금 손에서 미끄러지듯 멀어져 간다. 아무리 더듬어도 선명한 얼굴과 목소리는 잘 붙잡히지 않고, 자국만 남긴 채 희미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흐릿해진 틈 사이로 남아 있는 마음은 여전히 나를 움직인다. 겉으론 잊힌 듯 보여도, 내 삶의 결을 바꾸고 방향을 틀게 만든 건 언제나 그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함께했던 계절과, 놓아버린 손길, 다투던 순간과 화해하던 눈빛. 그것들이 내 삶 어딘가에 남아 있다면, 그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건 완벽한 기억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서 길어 올린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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