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내려앉은 오후, 오랜만에 친한 언니를 만나러 집을 나섰다. 거울 앞에 서서 머리칼을 정리하고 향수를 가볍게 뿌렸다. 향이 퍼지자 기분이 한층 더 설레었다.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오니 택시들이 줄지어 달리고 있었고, 손을 들어 한 대를 불렀다.
뒷좌석에 앉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 주소로 부탁드려요." 기분이 좋아 목소리도 조금 들떴다. 그런데 기사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곧장 가속 페달을 밟았다. 차가 툭 하고 앞으로 튀자 몸이 등받이에 눌렸다. 방금 전까지의 설렘은 금세 사라지고 기분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차는 처음부터 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지시등이 켜지기 무섭게 차선을 바꿨고, 브레이크는 자주 툭 끊기듯 밟혔다. 덜컹거릴 때마다 창문 옆 손잡이를 붙잡아야 했다. 기사님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차체가 요동칠 때마다 기분도 덩달아 흔들리며 불편함이 커졌다.
불편함은 점점 짜증으로 바뀌어 갔다. 짧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천천히 가달라고 말해볼까'하는 생각이 스치던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기사님은 한 손으로 전화를 눌러 스피커를 켰다.
"아버지 허리는 좀 어떠세요? 오늘은 쉬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차 안에 퍼졌다.
"됐다. 괜찮다."
짧게 답한 뒤 기사님은 전화를 끊었다. 차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 짧은 통화로, 오늘이 기사님에게 쉬운 날은 아니었을 거라는 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진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얼굴이 버티는 얼굴로 달리 보였다. 단면만 보고 서둘러 판단했던 내가 민망해졌다.
우리는 눈앞의 몇 장면으로 사람을 쉽게 완성한다. 짧은 대답에 성격을 붙이고, 굳은 표정에 하루를 얹는다. 나도 오늘 그 몇 장면으로 누군가를 결론 내릴 뻔했다.
책을 서너 장 읽다 덮어두면 이야기의 방향을 놓치듯, 사람 사이의 이해도 자주 중간에서 끊긴다. 그러면서 우리는 ‘안다’고 말한다. 아직 펼치지 않은 면이 더 많은데도. 그래서 한 장만 더 넘겨보자는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를 이어 주는 건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 끝까지 읽어보려는 태도일지 모른다. 오늘은 결론을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