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예민함과 섬세함의 사이

by 박아나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내가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믿어왔다. ‘예민’이라는 말을 적용하는 분야가 사람마다 달라서 한마디로 뭐라 말하기는 그렇지만, 내게 ‘예민’은 ‘반응이 빠르고 조바심을 낸다’는 느낌이었다. 뭐든 반응이 한 박자씩 늦었던 나의 단골 멘트는 “아, 그런 거였어?” “그때는 왜 몰랐지?” 였는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서였을까. 나는 내가 예민하지 않은, 조금은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피아노 연주회를 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처음 알렸을 때 “대단하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준비하는 과정 엄청 힘들겠다.”는 쏟아지는 반응들에도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말하며 꽤 느긋하게 말하곤 했다. 조바심과는 거리가 멀게. 어쩌면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남의 얘기하듯.

나의 마음처럼 느릿하게 흘러갈 것만 같았던 시간은 어느새 연주회 날까지 두 달이 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9월 30일까지도 멀쩡했던,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던 나의 마음은 겨우 하루 지난 10월 1일 그만 터져버리고 말았다. 그날은 피아노 레슨이 있는 날이었다. 한주 사이 연습을 충분히 했고, 그날 점검받을 모차르트 환상곡 KV 397은 다른 곡들에 비해 조금 더 자신이 있었다. 뭔가 보여줄 태세로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은 순조로웠다. 그것도 지금은 확신할 수 없지만, 그 당시는 순조로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자주 삐걱거렸던, 그래서 집중적으로 연습했던 프레스토 구간에 들어갔다. 첫 번째 프레스토는 아슬아슬한 통과. 잠시 방심한 사이 두 번째 프레스토는 삐걱이다. 불안한 손가락에 마음도 함께 요동친다. 다시 마음을 다 잡고 연주를 이어가니 어느새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 알레그레토다. 마의 구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을 뻔 했군. 사실 여기는 아무리 연습해도 크게 나아지질 않아서 집중적으로 연습했었다. 완벽하게 다 잡지는 못했지만, 지난 주는 안 될 때보다는 될 때가 많아서 조금은 자신이 붙었던 상태. 그러나 완벽하다고 생각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데, 완벽하지 않은 경우에는 더 말해서 무엇하나. 조금 붙었던 자신감이 바로 무너지자마자, 멘붕이 오면서 곡명대로라면 환상적으로 끝냈어야 했지만 환장할 상황으로 마무리되었다.

“연습을 어떤 식으로 하셨어요?” 연주를 끝냈을 때 선생님이 이 질문을 던지면, 연주가 많이 부족했다는 뜻이다. 아... 마음이 아리다. 뭔가 민망한 마음에 “열심히 연습했는데요...” 우물거리며 대답한다. 선생님은 시작부터 느낌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럴 수가... 첫 부분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가 문제였을까. 선생님은 곧바로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 알려주고, 해결 방법도 함께 제시해 준다. 그럼 신기하게도 바로 나아진다. 나를 제일 좌절시켰던 구간도 여지없이 쉽게 해결된다. 여기는 왼손이 문제다. 주선율인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그저 물 흘러가듯 고르게만 연주하면 되는데, 그 ‘고르게’가 잘 안된다. 쉽게 말하면 이런 식이랄까. 딴딴딴딴딴딴딴딴 이렇게 고르게 가면 될 것을, 딴딴단딴딴딴따안딴. 뭐, 이런 느낌이랄까. 일단 손가락마다 갖고 있는 힘이 다르기 때문에 고르게 들리려면 섬세한 힘 조절이 필요한데, 거기에 좁은 공간에 모여있는 음들을 연속적으로 빨리 쳐내야 되니 어려웠던 것 같다. 나의 ‘긴’ 세 번째 손가락은 그 공간이 너무 답답했는지 다른 손가락들에 비해 움직임이 둔했다. 그렇게 제박자를 못 맞추고 ‘딴’이 아니라 단’이나 ‘따안’같이 눌린 세 번째 손가락 덕분에 16분 음표로 이어지는 왼손 반주가 전체적으로 다 도드라졌다. 귀에 거슬리게.

어렵지 않은데(그래서 더 속상했던), 깔끔하게 처리가 안되서 고생했던 왼손 구간.

내 손가락을 유심히 보던 선생님은 나의 세 번째 손가락의 위치가 문제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길어서 통제가 안 되는 세 번째 손가락이 건반까지 내려오는 시간조차 들쑥날쑥해서 고르게 들리지 않는다는 진단이다. 이제까지 나는 세 번째 손가락을 건반 위에 붙여 두지 않고 위에서 내려찍고 있긴 했었다. 바로 이어지는 선생님의 해결책은 세 번째 손가락을 누를 건반 위에 미리 딱 붙이고 있다가 순서가 오면 지체 없이 누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라는 대로 하니까 지독히 풀리지 않던 왼손 문제가 깔끔히 해결된다. 이게 무슨 마의 구간씩이나 됐냐는 듯이. 속이 다 시원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허탈하다. 며칠을 고생했는데,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니.


“다른 곡들은 어떤가요? 잘 돼가고 있죠?” 선생님이 묻는다. 자신 있던 모차르트 환상곡도 이런데, 슈베르트는 어떡하지.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즉흥곡은 제자리걸음도 아니고, 이제는 후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곡에 비해 연습을 더 많이 하고 있는데 왜 그런 걸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물이 흐른다. 뭐지. 이 갑작스러운 눈물은. “저희도 그래요. 연주회 앞두고 7,8주 전에 연습실 오면 눈물부터 쏟고 시작해요. 지금 한 그 정도 시간 남은 거죠? 자연스러운 거예요.” 이번에는 선생님의 위로가 너무 와 닿아서 간신히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난다. “지금 잘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눈물이 이제야 멈춘다.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민망해서 다음 주에 선생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부터 시작해서 내가 이렇게 예민한 사람이었나까지. 뭐가 됐든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긴 한가 보다. 맨 처음 피아노 연습을 시작했을 때를 떠올려봤다. 슈베르트 즉흥곡 악보를 보면서 이렇게 빠른 곡을 어떻게 소화하지 싶었고, 모차르트 환상곡 악보에는 뛰어넘고 싶은 부분들도 있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연습을 하니 속도를 제법 낼 수 있게 되었고, 어렵게 생각되던 부분도 수월해졌다. 그렇게 곡에 익숙해지는 내가 뿌듯했었다. 그랬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곡이 점점 다듬어지고 하얀 도화지 같던 나의 연주에 감정이라는 색도 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은 조악한 느낌도 나긴 했지만, 제법 어울리는 색으로 꾸미는 날이 더 많아졌다. 그렇게 나의 감정을 음악에 담아 표현할 수 있다니 자랑스럽달까. 그래, 그런 날들이 있었다.

감정 표현이란 적절한 색을 채우는 거죠. 색칠 공부하듯이. 사진: 테크홀릭

그러나 사람이란 뭔가를 갖추면 갖출수록, 한 단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 많은 것을 욕심내게 된다. 너무 자연스럽게, 당연하다는 듯 연주에 대한 나의 기대는 한껏 높아져 있었다. 그 기대와 현실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럴 리가 없지. 내 기대는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 저만치 가 있었고, 내 실력은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주를 막 시작할 때는 그 차이가 크지 않아 의식조차 되지 않았는데, 출발선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벌어진 그 차이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기대치가 낮았던 시절에는 틀리지만 않아도 만족스러웠는데, 지금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내 실력은 내 눈높이가 올라가는 속도만큼 따라주지 못한다. 그렇게 실망은 커진다.

토끼와 거북이 사진 :프레시안

다행히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반전이 있다. 자신의 승리를 100퍼센트 확신한 토끼는 더 이상 거북이가 오는 게 보이지 않자 크게 안심하며 결승점을 앞두고 잠이 들었고, 그 사이에 거북이가 자기 속도대로 유유히 토끼를 앞질러 갔다. 그렇게 거북이는 토끼를 이겼다. 그랬다. 옛날 이야기 속에서는 그랬다. 어쩌면 지금이 내게 주어진 반전의 시간이라면. 토끼가 잠들어버리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가장 많이 벌어지는 지금 이 순간부터가 내가 나를 따라잡을 그 시점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동화 같을까. 그럼 이제 나는 옛날 거북이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 속도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문득, 기대하지도 않았던 어느 날, 기대를 따라잡는 날도 오겠지.


어떻게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겠냐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해도 속상하지 않을 것 같다. 지극히 둔했던 나의 감성이 섬세해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니까. 어떤 소리가 좋은 소리인지, 어떻게 연주를 해야 더 완벽한 흐름인지 매일매일 깨닫고 있다. 그동안 왜 이렇게 소리를 냈지, 손가락을 이렇게 쓰니까 소리가 별로지, 화음을 느끼면서 양손을 써야겠다, 감정은 이렇게 풀어가야겠구나. 소리와 연주에 더 엄격해지는 나는 어쩌면 섬세한 감각으로 거듭나고 있을지도. 그 섬세함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예민함, 나의 눈물은 그런 것이 아닐까 포장해 본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야 그 일을 잘하고 있는 거래요. 지금 잘하고 있는 거예요.”누군가가 나에게 건네는 위로. '고통 없이 희열도 없다'는 어떤 아티스트의 이야기. 많이 예민해지고, 자신감도 떨어지는 이 고통의 시기를 잘 극복하는 게 나의 과제다. 예민함은 섬세함으로 승화시키고, 자신감은 연습으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는 거 이미 알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하던 대로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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