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난 난 난 난 자유로와

by 박아나

콩.닥.콩.닥. 4분의 4박자, 아주 정확한 박자로 콩닥콩닥 나의 심장이 뛰는 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 휴대폰의 시계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지금 시각은 7시 58분. 2분 뒤, 8시 정각에 인터넷에서 시작될 전쟁을 앞두고 가슴이 떨린다. 예전에 아나운서였을 때도 매시 정각이 되기 전에 떨림이 있었다. 매시간 정각에 시작되는 라디오 뉴스. 보도국에서 원고를 받고 늦어도 십분 전에는 스튜디오로 올라가 예독을 시작한다. 예독이 끝나고, 앞에 놓인 시계를 바라본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한 스튜디오에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은 시계뿐. 뉴스 시작 1분 전, 50초 전... 10초 전... 1초 전. 미묘한 긴장감과 함께 온에어 불이 들어온다. 이렇게 시계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떨릴 수 있는 경험, 참 오랜만이다.

지겨운 이선좌...라는 말을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이미 선택된 좌석의 줄임말입니다.

사실 이날 나는, 밤 여덟 시의 전쟁을 치르기 전에 이미 한차례의 긴장을 맛봤다. 사지가 떨리는 불편한 긴장은 아니고, 설렌다는 쪽에 가까운 기분 좋은 떨림이긴 했지만. 연주회가 두 달도 채 남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연주하게 될 피아노가 어떤지 경험해 보려고 연주회장으로 향했다. 내가 연습하는 피아노와 소리와 페달의 진동이 다르고, 그 소리가 어떻게 나에게, 또 관객들에게 들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공연장을 알아보러 왔을 때와 달리, 이제 이곳이 나의 무대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감개무량하다. 무대에 덩그러니 서있는 스타인웨이 앤 선즈사의 그랜드 피아노에서는 뭔지 모를 위엄이 느껴진다. 저렇게 근사한 피아노를 내가 연주할 수 있다니 꿈만 같다.

나의 것인 것처럼 보이게 내 악보를 살포시 올려봤습니다.

“거기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나를 한번 연주해보시오.”라고 피아노가 내게 어서 꿈에서 깨라고 말한다. 보물 상자를 만지듯 피아노 뚜껑을 열고 조심스럽게 의자를 당겨본다. 그럼 먼저 스케일로 손가락을 풀어볼까. 도레미파솔라시도. 이렇게 한 음계만 쳐도 알겠다. 이 피아노는 지금껏 내가 쳐본 피아노 중 가장 좋은 소리를 가진 피아노다. 아직은 소리에 대해 취향이라는 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나만 잘하면 된다. 피아노는 완벽하니까. 콘서트홀의 음악감독님은 이 홀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소리에 집중해서 피아노를 쳐보라며 자리를 내어 준다. 소리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누를수록 마치 지금이 공연날인 것처럼 피아노 연주에 빠져든다. 기분 좋은 떨림으로 내 손가락이, 나의 생각이 취한다. 기분 좋은 햇살 아래 와인 한 잔을 마셨을 때처럼 나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간다.

뭔가에 취한 듯 한참을 쳤답니다.

그래. 이렇게만, 이 정도만 떨린다면 연주의 질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적당히 흥분된 나의 마음 상태 때문에 좀 더 극적인 감정 표현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희망사항일 뿐, 현실은 대체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인터뷰에서 “무대에 서면 설수록 떨린다”는 고백을 했다. 무대 경험이 많은 피아니스트들도 연주회 전에 엄청나게 긴장하는 경우가 많다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절대 없다는 피아노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이곳의 음악감독님도 외국에서도 활동하는 유명한 연주가가 처음 두곡까지는 긴장감 속에 아슬아슬하다, 세 번째 곡 들어가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피아니스트도 아닌 내가, 첫 무대를 무사히 해낼 수 있을까.


이런 피아노 독주회까지는 아니더라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손에 땀이 차는 그런 증상은 흔히 일어난다. 어렸을 때 반장 선거에 나가서 아이들 앞에서 연설할 때, 달리기 계주를 직접 뛰는 것도 아니고 응원할 때도 경험했다. 소개팅 자리에서 너무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와 회사 임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겠지. 우리는 무척 중요한 자리에서 당연히 긴장되고, 별것 아닌 자리에서도 떨리는 자신을 수시로 발견한다. 의외의 경험도 물론 있다. 예전에 라디오 디제이를 할 때, 디제이 콘서트라는 무대에 선 적이 있다. 각 프로그램의 디제이들이 합동 공연을 하는 것인데, 그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아나운서 세명이 함께 한 무대에 서게 됐다. 빠르고 신나는 곡을 좋아했던 나는 댄스곡을 하고 싶었지만, 나머지 친구들이 춤에 자신이 없다며 거부하는 바람에, 춤 없이도 신나게 부를 수 있는 지니의 “자유로와”를 부르게 됐다. 옛날 노래라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이 부분은 잊히지 않는다. “난 난 난 난 자유로와! 내 생각 내 행동 내 모든 것이. 헤이 헤이 헤이 워~~~”

지니의 자유로와. 신났죠. 사진 : TV REPORT

졸지에 메인 보컬이 된 나는 부담감이 컸다. 가창력으로 승부하기에는 출연진들이 대부분 현역 가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공연 당일 알게 된 충격적 사실. 우리 무대 바로 앞이 자우림이었다. 어머! 이건 반칙 아닌가요? 정말 주최 측에 항의하고 싶었다. 왜 하필 가창력 최고에, 외모도 엄청난 그녀가 우리 앞이었을까. 우리 순서를 기다리며 무대 밑에서 지켜본 그녀는 한마디로 무대를 갖고 놀았다. 충격과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어지는 초짜 세명의 무대. 자우림의 공연으로 뜨겁게 달궈진 관객들의 환호 소리에 내 몸속 온갖 호르몬이 요동치는 것 같다. '자유로와'의 전주가 흐르고 첫 박이 제대로 들어가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자신감과 흥이 생긴다. 드디어 시작된 이 곡의 킬링 포인트 “난 난 난 난 자유로와!” 여기서부터 소리 질러 제대로 들어간다. 어느덧 나는 이성의 끈을 놓고 무대 위에 설치된 스피커 위에 발을 올려놓고 격한 고갯짓에, 급기야는 무대 올라올 때 받았던 생수병의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노래 가사처럼 정말 나는 모든 것이 자유로워진 것일까. 그날의 나는 내가 생전 경험해보지 않은 저 세상 텐션의 나였다. 긴장 따위는 정말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언제 봐도 멋진 자우림의 무대. 그때 정말 엄청 기죽었었어요. 사진:조이뉴스24

어쩌면 이날은 엄청 큰 무대에 관객도 많고, 소리도 시끄럽고, 나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가 아니어서 떨리지 않았을까. 이번 피아노 연주회에서 내가 오를 무대는 누가 어느 자리에 앉았는지 다 보일만큼 가깝고, 관객과 눈이 마주치면 움찔할 수도 있는, 그런 공간이다. 무엇보다 어떤 소리도 없다. 오직 내가 내는 피아노 소리뿐. 그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긴장되는 마음을 잘 붙들 수 있을까. 들어가기 전 심호흡 세 번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내가 연주할 곡을 잘 안다.' 완벽하게 숙지한 곡이기 때문에 떨 이유가 전혀 없다는 자기 확신의 표현이다. 하긴 그렇지. 뭐든 준비가 잘 돼 있으면 자신이 생기고, 그 자신감 덕분에 떨리지 않겠지.

바로 여기서 저의 첫 연주회 "다시 만나는 피아노"가 열립니다. JCC콘서트홀, 11월 23일 4시. 인터파크 예매 중입니다.

일단 호로비츠처럼 준비를 철저히 하겠다. 그러려면 많은 시간을 피아노 앞에서 보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렇게 준비를 잘해도 떨리면 관객들이 모두 발가벗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긴장감을 덜어낸다는 어떤 피아니스트처럼 엉뚱한 상상력의 힘을 동원해야 될라나. 물론 거기까지 가기 전에 나의 연주에 몰입한 나머지, 그 어떤 생각도 끼어들 틈이 없었으면 좋겠다. ‘지니의 자유로와’를 불렀던 그날처럼 모든 것에서 자유로와지며 무대를 즐기다 못해 장악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흐뭇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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