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연주회 일지 Part 1

by 박아나

16일 토요일

토요일이 예전의 토요일이 아닌 지 오래됐다. 매일같이 피아노 연습을 해야 되는 내게 토요일, 일요일이라고 예외는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중에 달렸으니, 주말에는 좀 꾀를 부리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지, 놀고 싶다, 아니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연주회를 불과 일주일 앞두고 있는 상황. 정확하게 일주일 뒤인 다음 주 토요일에 무대에 서야 한다. 그래서인가.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자동으로 피아노 앞에 앉는다. 정신없이 연습하다 보니 세 시간이 지났다. 예전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들락날락 산만했었는데, 급하긴 한가 보다. 시간이 이렇게 지난 줄도 모르고 치다니... 너무 쉼 없이 쳤더니 손가락이 뻐근하다. 잠깐 쉬자. 커피만 한 잔 마시자.


17일 일요일

큰일이다. 다른 것도 뭐 부족함이 많지만, 슈베르트 즉흥곡 2번은 어쩔 것인가. 손가락이 내 마음같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연습량에 비해 이렇게 늘지 않을 수도 있는가. 물 흐르듯 흘러야 하는 주제부가 도통 흐르지 않는다. 어떻게든 쳐내려고 무리해서 연습을 많이 했더니 손목에 힘이 들어가서 아프다. 아니, 손목에 힘을 빼야 손가락의 움직임이 자유로울텐데, 이제 와서 어떻게 고치지? 손목에 힘을 빼니 손등이 펄럭거린다. 손목에 힘을 빼면서 손등은 탄탄하게, 그리고 손가락 끝에는 힘이, 삼권분립이 확실해야 한다. 슈베르트 때문에 연주회 못 할 것 같다는 비관적인 생각까지 든다. 그러고 보니, 슈베르트는 악연이었네. 어렸을 때 나간 콩쿠르에서도 슈베르트 곡을 연주했다가 예선 탈락했었는데, 나랑 슈베르트랑 잘 안 맞는 게 틀림없다. 아... 선곡할 때 여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네. 고민이 너무 커서 그런지 머리만 아픈 게 아니라 몸도 아프다. 으슬으슬.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밤이 되니, 본격적으로 목이 아프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군.


18일 월요일

헉. 이번 주가 연주회를 하는 주구나. 겨우 하룻밤 지났을 뿐인데, 어제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느낌만 다른 게 아니라 나의 몸 상태도 확실히 다르다. 자고 일어나니 더 아파오는 목. 아나운서 시절에 목 관리 전문이었는데, 요즘 손가락만 너무 관리했는지, 관리가 허술한 틈을 타고 목이 아파온다. 스카프로 목을 두르고 따뜻한 차도 한 잔 마신다. 아직 열은 괜찮은 것 같으니, 더 퍼지기 전에 감기의 불씨를 꺼야 한다. 아픈 것과는 별개로 이제부터는 아침이 아니라 오후 서너 시에 맞춰 연습을 해야 한다. 연주회 시간이 오후 네시라서 생체리듬을 맞추듯, 연주리듬을 맞춰야 한다. 계속해 오던 오전 연습을 안 하니 마음이 괜히 불안하다. 몸의 상태도 불안한데, 이러다 오후에는 더 아파져서 연습하는데 지장 있는 거 아닐까. 예전에는 이렇게 몸이 안 좋으면 바로 연습 건너뛰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생각이 1도 들지 않는다. 진작에 이랬다면, 정말 잘 쳤겠지. 이제 철들었나 봐. 역시 철은 늦게 드는 법.


19일 화요일

오늘은 레슨 있는 날. 연주회 전까지 오늘 외에 한 번의 레슨 기회가 더 있다. “컨디션 어떠세요?” 선생님의 질문에 마스크 쓴 얼굴이 답이다. 그렇지 않아도 모자란 제자가 아프기까지. 선생님에게도 미안하다. 첫곡인 모차르트의 환상곡부터 마지막 드뷔시 아라베스크까지, 연주회 프로그램 순서대로 연주한다. 연주에 대한 선생님의 코멘트는 반대로 드뷔시부터 시작된다. 드뷔시는 크게 거슬리지 않았던 것 같아 일단 다행이다. 다음은 문제의 슈베르트. 선생님은 해결방법을 제시해준다. 일단 E 플랫 장조 스케일을 쳐보라고 한다. 곡을 치기 전에 워밍업으로 늘 쳤던 스케일. ‘어렵지 않아’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한음 한음 고르게 눌러지지 않는다. 아, 워밍업이라고 대충대충 했었나 보다. 그렇게 기본이, 기초가 중요하다고 외쳐놓고서 이러기야. 팔꿈치를 좀 더 고정해야 되고, 손목의 힘은 좀 빼야 한다. 엄지 손가락의 힘도 조금 더 빼고, 엄지의 각도도 더 세워야 한다. 선생님의 지시대로 오르락내리락 몇 번을 하니, 처음보다 점점 소리가 좋아진다. 이 느낌 그대로 살려 슈베르트를 오른손만 연주해 본다. 아까 전보다 조금 부드러워진 느낌, 약간의 희망이 보인다. 그런데 이제 고친다고 고쳐질까 싶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머지 모차르트 소나타와 환상곡까지 꼼꼼히 점검한다. 선생님은 그동안 엄청 늘었다며 나를 칭찬한다, 아니 위로한다. “손가락 모양이 변하셨어요.” 네...? 흠... 내 손가락을 보니 뭔가 달라 보인다."예쁜 손가락이었는데, 좀 굵어졌어요. 연습 많이 해서 그래요.” 아... 예전의 내 손가락은 가늘고 긴 느낌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좀 짧아지고 퉁퉁해진 느낌적인 느낌이다. 가만히 만져보니 손가락들이 부어있다. 근육이라도 생긴 걸까. 내 뜻대로 쳐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손가락 모양이 변할 정도로 연습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면서 짠하다. 노력했으니까, 그랬으니까. 그걸로 어쩌면 이미 다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만나는 피아노" 리플릿도 만들었지요.

20일 수요일

연주회 전까지 되도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피아노 연주를 해보라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꽂힌다. 그래야 무대에서 덜 긴장될 거라고 한다. 딱히 누구 앞에서 연주할 곳이 없는데, 연주회 무대가 누군가의 앞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인데 어떡하지. 또 다른 문제도 있다. 내 연습용 디지털 피아노와 연주회장의 그랜드 피아노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그랜드 피아노는 몸집도 훨씬 크고, 건반의 소리도, 페달의 효과도 다르다. 처음에는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았는데, 연주회가 가까워질수록 조금 걱정이 되긴 한다. 건반을 누르는 무게감이 달라서 힘 조절을 세밀하게 다르게 해야 하는데, 그게 연주회 당일에 제대로 될까 모르겠다.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피아노 연습실을 이곳저곳 수배해 본다. 우리 동네 근처에는 마땅한 곳이 없어 난감해하고 있는데, 예전에 여의도에 있던 연습실이 떠올랐다. 전화를 해보니, 내일 예약이 가능하다고 한다. 여의도까지 가는 게 멀어서 내키지는 않지만 적응 훈련 삼아 가야 될 것 같다. 하긴, 내일 중앙대에서 수업이 있으니까 가던 길을 조금만 더 가면 되겠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연습이나 하자.


21일 목요일

오늘은 수업에도 가야 하고, 그전에 여의도 연습실에도 들러야 한다. 몸과 마음이 다 바쁘다. 잠에서 깨자마자 피아노 연습을 한다. 두 시간쯤 하고 나니 나가야 할 시간이다.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악보를 챙겨 여의도를 향해 달린다. 우리 집에서 여의도는 평소에도 먼길이지만, 요즘 날도 추워지고 연말이라 그런지, 고속도로 정체가 더 심해졌다. 멀리 운전하고 가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편은 아닌데, 요즘 페달을 많이 밟아서 오른쪽 발목이 계속 뻐근해 신경이 쓰인다. 운전을 오래 하면 발목에 더 무리가 올까 봐 요즘 운전이 좀 부담스럽다. 그래도 어쩌나. 아는 연습실이 거기밖에 없는데. 11시 반쯤 여의도에 도착했다. 한 시간 조금 더 걸려 도착했으니 나름 선방이다. 이렇게 바로 연습실로 가면 수업할 때까지 점심 먹을 짬이 없다. 시간도 없고 카페 라테로 배를 채운다. 요즘 놀랍게도, 식욕이 뚝 떨어져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솔직히 태어나서 입맛이 이렇게 없었던 적은 처음이다. 지난주만 해도 칼로리 폭발이었는데, 이번 주에 들어서면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피아노 연주도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잘하면 좋을 텐데... 오늘의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막히는 고속도로로 들어선다. 페달 밟아야 되는 내 소중한 오른발로 엑셀과 브레이크도 꾹꾹 밟아본다. 지친 몸으로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로그인한다. 인터파크에 예매를 의뢰했었는데, 이제 예매도 슬슬 마감해야 한다. 그래야 현장에서 받기로 한 표들을 내일 오후에 챙겨서 토요일에 가지고 갈 수 있다. 그 외에 연주회장 측과 몇 가지 조율해야 할 일들이 있어 문자를 주고받는다. 1인 기획사? 는 이래서 힘들다. 이런 류의 일들을 대강 정리하고, 연주 끝나고 바로 이어질 토크도 준비한다. 예상 질문들을 뽑아보긴 했는데, 그대로 진행할지는 모르겠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꾸며낸 이야기보다는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머리를 비워두기로 한다.


22일 금요일

이제 하루 뒤면 그날이다. 오늘부터 뭔가 겁나게 긴장될 것 같았는데, 의외로 담담하다. 심지어 즐겁다면 믿어지는가. 연주회날을 엄청 기다렸던 것일까, 아니면 이제 하루만 버티면 끝이니 해방이라 기쁜 걸까. 뭔지 알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좋으니 좋다. 마음은 이렇지만, 몸의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자다가 기침이 나와서 자꾸 깨고, 아침저녁으로 열이 오른다. 연주하다 도중에 콧물이라도 나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큰 일을 앞두고 이게 뭔 일인지. 면역력 약한 내가 잘못이다. 그래도 내일 혹시 망치면, 감기 핑계를 댈 수 있으니 한편으로는 감사하다. 열심히 노력한 자에게 도망갈 구멍을 마련해 주었으니. 연주회 전, 마지막 레슨을 하러 간다. 선생님 앞에서는 너무 여러 번 선보였기에 조금도 긴장되지 않는다. 관객이 선생님 한 분이라면 좋겠다. 오늘 선생님은 틀린 부분에 대해 크게 강조하지 않았다. 대신, 너무 서두르지 말고 편안히 연주하라는 주문이다. “연주회장에서 연주하다 보면, 정말 오롯이 피아노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런 집중의 순간이 올 때가 있어요. 그런 모멘트만 경험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과연 나에게 그런 순간이 올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될까. 연주회 전 마지막 레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공식적인 마지막 연습도 끝냈다. 마지막이라 연습을 더 많이 하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살짝 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찜질로 손가락의 피로를 달래 본다. 피아노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며 쓰다듬어 주었다. 피아노도, 나도 그동안 고생 많았다.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내일은... 내일 생각하자.


p.s 다음에는 연주회 당일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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