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회 일지 Part2
04:00 기침과 함께 눈이 떠졌다.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분명 즐거운 마음으로 잠이 들었던 것 같은데, 뭔가 부정적인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어두운 새벽의 기운 탓일까. 관객들이 오지 않은 객석을 바라보며 불안하게 떨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나를 잠식한다. 다시 눈을 붙이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07:00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일어났다. 얼굴이 뜨겁다. 잠을 설쳐서인가, 열이 나서 인가. 늘 그랬듯 커피를 내렸다가 멈칫한다. 카페인이 다른 날보다 더 심장을 뛰게 만들면 어떡하지 싶어 그만둔다. 잠시 몸을 움직였다가 피아노 앞에 앉는다. 어제 삐끗한 손가락이 다행히 괜찮다. 당일날 아침에는 잘 안 되는 부분만 연습하고 나오라는 선생님의 말이 떠오른다. 공연은 16시, 앞으로 아홉 시간 뒤지만, 가기 전에 들를 곳도 있고, 이동 시간도 있고, 공연 전 리허설도 해야 되고, 시간이 빠듯할 수도 있다. 한 시간 정도로 연습을 끝냈다.
09:30 토요일 아침 미용실은 늘 결혼식 전쟁이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앞둔 신부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훔쳐본다. 설렘과 긴장, 기쁨과 막막함이 교차한다. 지금의 내 얼굴도 저런 표정일까.
12:00 아침에 일어났을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아직도 몸 컨디션이 별로다. 점심은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아 국밥을 시켰는데, 생각보다 잘 들어간다. 그동안 입맛이 없었는데 이상하다. 한 그릇 다 해치우면 폼이 덜 날 것 같은 스스로의 편견에 부딪쳐 숟가락을 놓는다. 밥심이 더 중요한 것 같은데, 여기서 폼이 웬 말이냐.
12:30 연주회가 열리는 JCC홀에 도착했다. “다시 만나는 피아노”. 입구에 나의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걸 보니 실감이 난다. 대기실에 짐을 내려놓고 무대로 갔다. 피아노 조율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사실 미세한 소리의 차이에 예민할 정도로 귀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 어떻게 조율이 됐어도 크게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 싶어 맨 아래 건반부터 맨 위 건반까지 쭉 훑어본다. 어떤 음을 눌러도 소리는 잘 난다. 그럼 됐지, 뭐.
13:00 조율도 마무리된 김에 바로 피아노를 쳐본다. 입고 온 외투를 벗지도 않고 한참을 치다가 몸이 둔함을 느끼고 외투를 벗었다. 약간 차가웠던 손이 녹으면서 손가락도 조금 풀렸다. 연주회 때도 한 곡 끝나고 인사하러 나갔다 들어오면 그 사이 손이 차가워질 수 있기 때문에 핫팩을 준비했다. 피아노 선생님은 땀이 날 것에 대비해서 손수건도 준비하라고 했는데, 그것은 깜박했네. 뭐 혹시 손이 축축해지면 그냥 옷에 닦기로 한다. 연주 프로그램 순서대로 첫곡부터 앙코르 곡까지 완주했다. 그렇게 잘 치지도, 그렇게 못 치지도 않은 느낌. 이대로만 연주회 때 친다면 망신은 면할 것 같다. 연주를 듣고 있던 음악감독님은 중간중간 급하게 연주되는 부분이 있다며, 조금 더 여유 있게 연주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슈베르트 즉흥곡에서 포르티시모(매우 세게 연주하라는 말)가 지나치게 크다며 공간이 주는 울림을 느낄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하다는 말도 덧붙인다. 내가 무대에서 들리는 소리와 관객석에서 들리는 소리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고마운 조언들이다. 틀리지 않고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에만 급급해서 더 그런 것 같다. 연주회 직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잘 안되더라도 일단 지적받은 부분들은 신경 쓰기로 한다.
15:00 리허설을 길게 하면 정작 연주회 때는 지쳐있을 게 분명하다. 이제 더 연습한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어 한 시간 만에 리허설을 마쳤다. 제일 걱정되는 슈베르트는 이제 마음을 내려놓았다. 중간중간 어설퍼도 끝까지 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인 것으로 마음을 바꿔본다. 사실 연습을 더하고 싶었지만, 여기저기서 나를 찾아서 집중하기 어려웠다. 공연 준비의 모든 과정을 내가 총괄했기 때문에 표부터 시작해서 꽃바구니를 받는 일까지 중간중간 체크하고 전화도 받아야 했다. 가족들이 도와주긴 했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내가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연주 무대 리허설은 했지만, 토크 리허설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토크의 진행을 맡은 이십년지기 아나운서 동기만 믿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 이런 식으로 진행하겠다는 대강의 틀만 정하고, 질문은 분위기 봐가며 하기로 한다. 토크를 위해 마련된 의자에 앉아있는데 기분이 묘했다. 아나운서 동기였던 우리가 이런 무대에서 이런 식으로 함께 할 줄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내가 피아노 연주회를 열 줄이야... 심지어 이제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15:20 곡이 끝날 때마다 등, 퇴장과 인사를 해야 하는데, 그것까지 리허설을 하지는 못했다. 관객들이 15시 30분부터 입장한다고 하니, 그전까지 조금의 시간이 있다. 얼른 무대 의상으로 갈아 입고, 무대 위로 나왔다 들어가는 연습을 했다. 옷까지 갖춰 입으니까 실전의 느낌이 팍팍 든다. 그전까지는 이것저것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결전의 순간이라기엔 뭔가 너무 비장하고, 뭐랄까, 기분 좋은 떨림의 순간이다. 여기서 더 떨리면 안 될 것 같지만.
15:55 오 분 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은 굳어진다. 아무리 찾아봐도 도망갈 구멍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야 될 것 같다. 원래 나의 의도는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의 행적을 다 카메라에 담을 생각이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들어야 할 짐도 많았고, 챙겨야 할 것들도 쌓여있었던 내게 동영상 촬영은 무리한 욕심이었다. 그러나 연주회 직전의 이 순간은,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기에 꼭 남기고 싶다. 첫 연주회의 오분 전은 첫 연주회만큼이나 의미가 있지 않은가. 지금의 상황을 카메라에 담아 본다.
16:00 연주회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무대의 조명이 꺼졌다 켜졌다, 내 정신도 함께 꺼졌다 켜졌다 한다. 호흡을 가다듬고 무대로 나가는 문 앞에서 대기했다. 연주자들은 늘 겪어야 하는 이 순간이 내게는 무척 특별하게 다가온다. 문이 열리면 다른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외롭고 낯설었던 그동안의 시간들을 뒤로하고, 나를 위한 조명이 비추는, 조금은 부담스럽고 생소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기다렸지만 기다리지 않았던 그 순간이 왔다. 문이 열리고 빛나는 박수 소리가 나를 맞이한다.
첫 곡 피아노 앞에 앉는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긴 한숨과 함께 조심스럽게 첫 음을 누른다. 그럭저럭 순조롭게 연주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생각들. ‘지금 이 순간이 정말 내게 오다니...’, ‘감개무량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화양연화인가?’라는 생각에 갑자기 울컥한다. 연주 도중에 눈물이라, 그것은 정말 상상조차 해 본 적도 없기에 일단 평정을 되찾는다.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지, 흔들거리는 마음에 손가락도 함께 흔들린다. 실수했던 적이 없는 부분이었는데, 왜 틀렸을까. 이런 생각에 젖어있으면 연주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되도록 지우려고 애쓴다. 결국 몇 번을 더 삐그덕 거리고 나서야 끝났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뭔가 멋쩍다. 나름 데뷔곡이었는데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래도 괜찮은 척해야 관객들도 잘한 것처럼 믿는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다시 잘한 척 웃어 보이기에 이미 늦었다.
두 번째 곡 무대 뒤 다른 세계로 잠시 넘어왔다. ‘왜 그랬어’라는 근심 어린 표정과 ‘다음에는 더 잘할 거야’라는 기대의 눈빛을 읽는다. 내 마음도 정확히 그렇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다른 세계로 떠난다. 처음 무대로 등장했을 때보다는 여유가 생겨 관객들의 얼굴이 조금씩 들어온다. ‘얼마나 잘하는지 평가해 주겠어.’ ‘슈베르트가 제일 기대돼.’라는 누군가의 말도 떠오른다. 아는 얼굴과 눈이 마주치면 연주 내내 그 사람 생각이 날 것 같다. 그래,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에는 내 무대가 아깝다. 그냥 피아노와 나만 생각하자. 그렇게 집중했지만, 실수는 피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갈수록 실수에 조금 뻔뻔해져서 그 점은 다행이다.
세 번째 곡 이 모든 과정이 다 도전이었지만, 특히 이 곡은 나를 끝까지 괴롭혔다, 아니 아직도 괴롭힘이 현재 진행 중이다. 그럼 연습이 완벽하게 잘 된 곡이 뭐냐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슈베르트 즉흥곡을 이런 부담감을 가지고 연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잘 칠 거라는 기대는 내려놓은 지 오래다. 연습량으로는 그 어떤 곡도 따라올 수 없지만 이상하게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렇게 연주회 날인 오늘까지도 잘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된 거다. 그렇다고 이 곡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알프레드 브렌델처럼 잘 치기는 어렵겠지만, 언젠가는 내가 만족할 정도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게 오늘이 아니어서 그렇지. 선생님은 속도를 내지 말라고 했지만, 정말 빠르게 칠까, 첫 음을 누르는 순간까지 고민했다. 후루룩 빨리 쳐버리고 나면 혹시 괜찮게 들리지 않을까, 속이라도 뭔가 후련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슈베르트를 제일 기대한다는 사람에게는 조금 미안했지만, 결국 나는 나만의 속도로 연주했다. 조금 느릿하게 가는 내 인생의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걸어갔다.
마지막 곡 이제야 마음이 평온하다. 드뷔시를 드뷔시답게 표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 달간 이곡을 붙잡고 있으면서 나만의 분위기를 담고 싶었다.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긴 곡도 아니긴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아라베스크의 시간은 지금까지 이 곡을 연습했던 수많은 시간 중에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 드디어 마지막 마디. 잠에서 깰까 봐 두려운 듯 건반을 옅게 누르는 손가락, 스르륵 페달에서 떼는 발에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박수 소리가 알람 소리처럼 들린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앙코르 곡까지 나는 준비한 것들을 다 보여 주었다. 만약 내게 한 달의 시간이 더 있었다면, 나는 그만큼 더 준비가 잘 돼서 잘 치고 있었을까. 프로 연주자들도 연주회를 바로 앞두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전전긍긍한다고 한다. 그때마다 내게 좀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외치곤 하지만, 주어진 시간만큼 더 느긋하게 연습 준비를 할 테니, 결국은 이러나저러나 똑같을 거란다. 예전에 시험 공부했을 때를 상상해 보라. 시간이 더 많이 주어지면, 그만큼 더 놀다가 늦게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나. 무대에서의 실력은 평소의 70 퍼센트 정도나 나올까 말까라는 연주 세계에서 통용되는 이야기에 역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아픈 깨달음도 덤으로 얻는다.
“이번 연주회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이어지는 토크 시간에 받은 마지막 질문이다. “15년의 아나운서 생활 동안 얻은 것도 물론 많았지만, 정작 나라는 사람은 없었던 시간이었어요. 퇴사를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이런저런 도전과 연주회까지... 잘 되지 않은 것들도 많고,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이번 연주회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기보다는 그런 제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시 만나는 피아노’는 결국 ‘다시 만나는 나’였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연주회는 끝났고, 솔직히 후련하다. 이제는 도전이 아닌, 나의 자연스러운 일과로 피아노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그런 의미에서 또 다른 시작이다.
p.s 제 도전에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