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낭만을 즐길 시간 사이로

by 박아나

연주회가 끝나니 큰 시험이라도 치른 것처럼 속이 시원하다. 그동안 못 놀았던 것을 몰아서 하고 있는데, 두 주 가까이 그렇게 지내다 보니 슬슬 불안해진다. 뭐라도 다시 시작해야 될 것 같아 악보를 사러 갔다. 다음에 연주회를 또 하게 될지 어떨지, 아무런 계획도 없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피아노 레슨은 계속 받고 싶어서다. 연주회가 끝나면 실력이 엄청 늘어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칠 수 있을까 싶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발라드 1번은 나의 드림 곡인데, 꿈은 원래 꿀 때 행복한 법. 꿈 옆에 계속 서성거리면서 행복감을 오래 맛보는 전략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피아니스트 쇼팽.jpg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모습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이 연주하는 쇼팽의 녹턴들을 듣다가 op.9부터 일단 시작해보기로 했다. 루빈슈타인처럼 연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쇼팽이니까, 왠지 이번 겨울은 낭만적으로 보내게 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낭만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것을 보니 나의 일상에 여유가 생기긴 했나 보다. 하긴 매일 하던 네댓 시간의 연습 시간만큼 시간이 생겼고, 연주회 준비로 필요했던 다른 시간들까지 더해지면, 꽤나 많은 시간이 내게 돌아왔다. 누군가 연주회가 끝나면 허전해서 어쩌냐고 했지만, 아직 허전함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대신 뭔가를 기획하고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은 조금씩 든다. 아마도 ‘허전’이라는 감정이 들어서지 못하게 하려고 방어막을 치는 것이려나.

쇼팽 녹턴 9.jpg <작품번호 9-2는 예전에 쳐봤고, 일단 9-1을 연습하기로>

12월을 낭만적으로 보내고 싶지만, 시간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피할 수 없나 보다. 나의 시간들은 어떠한가. 입국과 동시 바로 출국을 하는 방탄소년단처럼 24시간이 모자라는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나는 매일 그렇게 바쁘고 싶다. “야! 그렇게 매일 살아봐라, 얼마나 힘든데! “라고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원래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부러움은 늘 있게 마련. 솔직히 “나 한가해”하고 한가함을 자랑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다들 바쁘다고, 정신없다고, 물론 정말 힘들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게 자랑인 것처럼 말하잖아. “나 한가해” 뒤에는 “... “이 있지만, “나 바빠” 뒤에는 “!”가 붙으니까. 송년회 시즌인 12월, 누군가를 만나자고 하기에 그 누군가, 혹은 누군가들은 너무 바빠 보여 말도 꺼내지 못하고 나만의 여유를 즐긴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여유가 실제로 마음에도 있으면 좋으련만.

방탄 출국 1.jpg 일본에서 입국하자마자 미국으로 출국하는 방탄소년단 사진: 텐아시아

바로 인정하기는 부끄럽지만, 내 마음에 여유는 그렇게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무런 보상 없이 뭔가를 계속 해내는 것은 답안지가 없는 문제를 푸는 것처럼 막막한데, 그 답답함이 점점 커지고 있다. 경제적인 문제를 떠나, 글을 쓰고, 유튜브를 만들고, 연주회를 하는 모든 일이 나 혼자만 보고 느끼려고 하는 일들은 분명 아닐 텐데, 내가 왜 이렇게 글을 올리고 있을까, 유튜브 영상은 얼마나 본다고 만들고 있을까, 그런 생각들이 주기적으로 왔다 갔다 한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렇다. 연주회라는 꿈에서 깨어나니, 요즘 말로 현타가 슬그머니 오고 있다. 나의 현생은 이대로 괜찮은 것인가.


아는 동생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자기 브랜드 론칭을 앞두고 이것저것 고민이 많은 그녀에게 할 말은 아니지만, 유튜브 때문에 걱정이 많다고 말해 본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그녀는 내 채널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은 아니라고 한다. 피아노나 클래식을 듣는 것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그 자세한 내용까지 얼마나 관심이 있겠냐는 현실적인 이야기. 생각해보니, 나도 처음에 유튜브 채널을 만들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야겠다고 했었다. 뭘 할까 고민하다가 내가 가장 관심 있는 분야를 하는 게 오래 할 수 있지 않겠냐 싶어 피아노라는 주제를 선택했었고. 그러나 피아노를 잘 치는 것만큼이나 피아노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용도 그렇지만, 나의 모습을 편히 담지도 않았다. 뭔가 고전하고 있는 모습보다는 잘 치는 영상만 골라 올리고 있다. 누군가 원고를 써준 것처럼, 실제로 내 머릿속에서 나온 말들이지만, 전직 아나운서답게 정리된 멘트만 하고 있다. 기획부터 출연, 제작까지 온전히 나의 몫인데, 그 안에 ‘나’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그래서일까. 이제 겨우 열 번째 영상을 올렸는데, 하기 싫은 숙제를 내는 것처럼 간신히 해내고 있다.

레가토 박.jpg www.youtube.com/c/legatopark

셀 수도 없이 많은 유튜버들 사이에서 대단히 성공해 보겠다고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묻히려고 시작한 것도 아니다. 주변의 유튜버 선배들은 꾸준히 올리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라고 하지만, 꾸준함만으로 과연 유지가 될는지 의심스럽다. 모 연예인이 시끌벅적하게 유튜브를 시작했지만, 내용이 재미가 없고 볼 게 없어서 구독자 수도 줄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같이 맞장구를 쳐줄 입장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내 채널을 얘기하면서 “어쩌려고 저럴까?”라고 말하고 있을지도 모르잖소. 내가 좋으니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말릴 사람은 없겠지만, 적어도 구독자수나 조회수를 의식하고 있다면, 그럼 생각을 좀 달리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점점 많아진다. 내가 가는 길이 맞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모두가 그렇다면 이 세상에 실패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테지만.


연주회 끝나고 여유가 생긴 이 겨울, 쇼팽의 녹턴으로 낭만을 좀 누릴라고 하니,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묻혀 두었던 고민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큰 산을 넘었더니 작은 산들이 역시 기다리고 있었어. 다른 데 눈 돌릴 틈 없이 연주회 걱정만 하던 그때가 그리워지려고 한다. 그때 그렇게 스트레스 받아했던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이다.


오늘 만난 동생과 헤어지면서 뭔가를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연주회를 준비할 때의 내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때가 힘들었지만 빛나는 순간이었다. 어두운 새벽에 가장 환하게 별이 빛나는 것처럼. 그때를 벌써 잊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남에게는 쉽게 하는 말이 내게는 전하지 못한 진심처럼 겉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것. 뭔가를 기다리고 준비하는 그 과정을 행복한 기억으로 기억할 수 있게 진짜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그것부터 찬찬히 생각해 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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