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eat, pray, love

by 박아나

eat, pray, love를 읽은 친구가 금쪽같은 말들이 정말 많았다며 극찬한다. eat, pray, love라... 바지가 잠기지 않을 정도로 피자와 파스타를 먹으러 이탈리아 먹방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들었던 영화 아니었나. 인도에서 명상 수련을 하면서 고전하는 줄리아 로버츠를 보면서 저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비워지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나 싶었지. 그때의 나는 그랬다.

줄리아로버츠2.jpg 영화 "eat, pray,love" 에서 피자 먹는 줄리아 로버츠 사진 : 네이버 영화

영화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탈리아에서 인도로, 발리로 떠난 주인공, 줄리아 로버츠의 채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는 여정을 그린 영화다. 삶에 지친 그녀에게 먼저 필요했던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채우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그녀는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물론 마음을 수련하는 과정, 그러니까 마음을 비워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제야 평온해진 그녀는 삶의 균형을 되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어렵게 비워낸 마음을 다시 채워야 했다. 사랑으로.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본다. 처음에 남의 이야기 같던, 이탈리아의, 인도의, 발리의 줄리아 로버츠의 모습은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그동안의 생활에서 떠나온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뭔가 계획이 있으니까 그만두었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당시 나는 은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쉬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달콤함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던 마음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삶이 뭔가 잘못돼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밀려왔다. 복잡한 마음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우고 싶어 명상을 시작했다. 줄리아 로버츠처럼 제대로 명상을 하기 위해 인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명상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현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조금씩 터득하면서. 그렇다고 내가 발리의 줄리아 로버츠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나의 삶은 이탈리아와 인도, 발리를 오가고 있다.

명상.jpg 명상을 하는 영화 속 줄리아 로버츠. 사진 : news1

연주회 이후 오랜만에 피아노 선생님의 레슨을 받았다. 원래 계획으로는 쇼팽의 녹턴을 멋지게 치고 싶었지만, 현실은 연습 부족으로 그동안 무너진 손가락 근육을 다시 되살리는 일이 시급했다. 피아노 전공한 사람들이야 이주 정도 쉰다고 연주 실력에 큰 변화가 없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근육이 별로 없는 나는 일주일 정도 운동을 가지 않으면 없던 근육도 더 없어진다. 훨씬 더 섬세함이 요구되는 손가락 근육은 어떻겠는가. 앞으로 이런 식으로 연습을 게을리하면, 피아노 연주회 때 실력으로 끌어올리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다시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이 쉽지 않다. 예전처럼 네댓 시간은 아니어도 두 시간은 쳐야 되지 않겠냐는 생각만으로도 상당히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 걸까. 피아노가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만은 확실하다.


선생님은 한두 시간은 연습해야지라는 마음부터 비우라고 한다. 대신 하루에 딱 10분만 연습하자 하고 마음먹으라고 한다. 그러면 피아노 앞에 앉는 게 덜 부담스럽고, 10분 연습하겠다고 해서 정말 10분만 하겠냐는 거다. 하다 보면 30분이 되고, 한 시간이 될 수 있다며, 일단 앉기부터 하라는 이야기다. '그래, 정말 그렇겠지.' 하고 피아노 앞에 앉는다. 시간을 재지는 않았지만 한 시간 정도 흐른 것 같다. 앉기 전까지는 그렇게 마음이 복잡했는데, 연습을 시작하니까 마음이 편안하다. 마음을 비우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기보다는 피아노를 치다 보니 마음이 비워졌다.


그러고 보니 마음을 비우는 일은 여전히 내게 필요한 것이었나 보다. 예전에 명상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지만, 명상의 길은 쉽지 않았다. 눈을 감고 뭔가 따뜻하고 환한 존재, 태양 같은 것을 떠올리고, 그것이 나를 비추고, 나를 감싸 안는다고 상상하는 일은 매번 낯설었다. 그래서 명상에도 오랜 수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명상을 연습하는데, 영화 속 줄리아 로버츠처럼 오만가지 생각들이 먼저 자리 잡는다. 명상 끝나고 나면 빨리 집으로 가야겠지? 가는 길에 장을 좀 봐야 되나?... 이 정도의 생각이면 금방 지워낼 수 있다. 명상을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나는 뭘 하고 살아야 될까?...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명상이 아닌 블랙홀로 빠져 든다.

사랑의 블랙홀.jpg "사랑의 블랙홀"이란 영화가 있었다. 사진 : 네이버영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 나는 블랙홀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까. 그렇지 않다. 블랙홀은 내 머릿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단지 그 블랙홀이 커지냐 작아지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연주회라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을 때는 블랙홀을 의식하지 못했다. 물론 그 당시에도 고민은 많았지만, 가야 할 길이 확실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가. 목표가 사라진 자리에 블랙홀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생각도 안 들 것 같지만, 내 머릿속 블랙홀의 공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한다.


누군가 묻는다. 다음 연주회는 언제냐고. 사실 이 질문은 연주회 날 토크 시간에도 받았던 질문이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지만, 이제는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다시 반복하기에는 쉽지 않은 길이고, 한 번 해봤다고 달라진 것도 없다. 여전히 내 안의 블랙홀은 이글거리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의 달콤함만큼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의 씁쓸함도 경험했다면...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 오는 달콤함이 예전만큼 달지 않고, 씁쓸함이 더 쓰게 느껴진다면... 그럼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지만, 연주회가 됐든, 그 무엇이 됐든, 채우고 비우고 다시 채우는 일을 반복하는 수밖에. 그렇게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금의 나, 미래의 나였으면 좋겠다.

줄리아로버츠4.jpg 책으로 다시 읽어봐야겠다. 사진 :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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