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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Aug 01. 2020

박아나의 일상뉴스

너와 나의 말센스

“나는 말하는 것이 침묵하는 것보다 좋다는 확인이 들 때에만 말한다.” 로마시대 철학자 카토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만큼 정말 꼭 필요하고 의미 있는 말만 했다는 건데, 앞서 인용한 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에 던진 말이겠지. 꾹 참다가.


 참으로 요즘의 나는 꾹 참는 것이 잘 안된다. 그러니까 침묵이 잘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렸을 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달리 조용했다. 누군가 말을 걸 때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내게 엄마는 같이 놀아줄 친구를 놀이터에서 맺어 주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철학자 카토처럼 필요한 경우에만 말했다.


 그런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 사귄 친구들의 영향이 컸을까, 아니면 사춘기를 맞아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하루가 다르게 말이 많아졌다. 쉬는 시간에는 말로, 수업 시간에는 글로 (때로는 말로) 수다를 떠느라 바빴다. 말이 많아질수록 친구들과의 우정도 더 돈독해졌고, 존재감도 커졌다.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사람이 평생 하게 되는 말의 양은 다 같은 걸까. 어쩌면 아나운서가 된 것도 우연은 아닐지도. 말로 먹고사는 직업을 해서라도 못했던 말들을 채웠어야 했나 보다. 뭐든 하면 는다고, 아나운서가 되니 정말 말도 더 늘었다. 어떤 자리에서든 당황하지 않고 말로 때울 수 있는 괜찮은 능력도 얻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양면이 있듯이, 아무 말로라도 채워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도 함께 생겼다. 이런 증상을 깨달은 것은 소개팅을 나가서였다. 나는 처음 보는 상대 앞에서도 마치 방송을 진행하듯 매끄럽게 소개팅 자리를 이끌어나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도 성심성의껏 질문을 했고, 대화를 잘 이어 나갔다. 그 덕분인지 상대방은 내게 호감을 느꼈다. 아니 정확히는, 상대방은 내가 그를 마음에 들어한다고 거의 100퍼센트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성공적인 소개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애프터 신청을 받는다. “죄송합니다. 인연은 아닌 것 같아요.”


 가끔은 잘 알지 못하는 내용도 아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원래 잘 모르는 내용을 아는 척하면서 말할 때 흔히 일어나는 현상은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핵심을 제대로 파악했으면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일을 참 길고 장황하게 말하게 된다. 뉴스 앵커로서,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혹은 내가 기대하는(대부분 이쪽이겠지만)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의식이라도 하는 건가. 뭐든 다 꿰고 있어야 된다고 아나운서를 그만둔 지금까지도 이런 압박을 자주 느낀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라디오에서 얼마 전 개봉한 영화를 소개하는 것을 들었다. 친구와 무슨 영화가 재밌는지 이야기하다 마침 방송에서 소개한 그 영화가 떠올라 추천한다. “네 추천대로 영화 당장 봐야겠어.” (뿌듯하군.) 다른 친구를 만나 또 영화 이야기를 나눈다. 영화를 방금 보고 나온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한다. “나 그 영화 봤는데, 그냥 그랬는데...” (이런... 진작 봤다고 하지.)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그동안 익힌 말하기 스킬과 사회에서 배운 눈치를 총동원해서 나름의 의견을 제시해본다. “근데 결말에 주인공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글쎄... 거기까진 모르겠는데,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다고 말은 해야 되겠지...?)


 예를 들었지만 왜 있었던 일 같은 것은 기분 탓인가. “영화 안 봤는데, 어때?” “내용이 어렵더라, 알면 설명 좀 해줘.”라고 말해주는 친구가 솔직하고 담백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묻고 싶다. 도대체 왜 그렇게 잘 모르면서 잘 아는 것처럼 장황하게 늘어놓는가.


 셀레스트 헤들리가 쓴  <말센스>라는 책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거나 특정한 주제에 대해 실제보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진단한다. 첫째, 사람들에게 나에 대한 깊은 인상을 남기고 싶기 때문에. 두 번째,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내가 똑똑하다고 생각해주길 바라는 것은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위해 자연스러운 일이라 치자. 도움 요청을 일종의 결함인 것처럼 생각할까? “사람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일종의 결함인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성향은 고도로 경쟁적인 사회 환경에서 더더욱 악화되지요. 사람들은 경계를 늦추고 약점을 드러내 보이면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불안해합니다.” <도움:인간의 근원적인 딜레마>라는 책의 저자, 가레트 가이저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그 일에 대해 무지하거나 잘 알지 못한다는 인상을 심어줄 가능성이 크다. 마치 자신의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나는 능력이 없어요’라는 의미로 전환되는 것은 아닐 텐데, 언제부터인가 모른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부담스러워지고 있다. 약간 이런 느낌 아닐까.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세상에 그것도 모르다니, 너무 뒤처지는 거 아니냐고. SNS에 돌고도는 이야기들을 모르는 거 보니 아싸 아니냐고. 뒤쳐지기도 싫고 아웃사이더도 원치 않으니, 그냥 적당히 아는 척하는 편이 낫겠다고.

셀레스트 헤들리의 <말센스> 출판사 : 스몰빅라이프

 요즘 말을 하면서, 특히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말센스가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내가 대화를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기도 했으나, 점점 입 다물고 가만히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커져만 간다. 얼마 전에도 내 유튜브 개인 채널인 <무료한 박아나>에서 ‘대화 나르시시즘’에 대한 언급을 했는데, 무슨 이야기든 결국 나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한다는 성향에 대한 거였다. 친구를 위로한답시고, 비슷하게 힘들었던 내 경험을 늘어놓고, 조용히 들어만 주면 될 이야기에 내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런 사소한 대화에서조차도 중심이 되는 ‘인싸’ 여야 된다는 걸까. 아니면 장황하게 말하는 것이 친구를 위한 충분한 위로가 된다고 믿는 걸까. 대화 나르시시스트로서 반성한다. 그렇게 길게 내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내 해묵은 감정들을 해소하고 있는 걸까. 상대가 아닌 나를 위로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고.


  유독 긴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은 생각도 많아진다. 다시는 내 이야기를 길게 하지 말아야지. 다음에는 듣고만 있어야지.


  매번 실패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조용히 다독여 본다. 언젠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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