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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Nov 22. 2020

박아나의 일상 뉴스

블루 앤 그레이

 11월 23일은 내게 특별한 날이다. 2019년 11월 23일, 나는 “다시 만나는 피아노” 콘서트를 열었다. 무슨 생각으로 피아노 연주회를 할 생각을 했던 건지 지금 생각하면 참 아찔하다 싶다. 만약 실력이 더 좋아지기를 기다렸다가 몇 달 뒤로 연주회 날짜를 잡았다면... 어쩌면 연주회 자체를 취소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세상이 펼쳐졌으니까. 좀 무리긴 했지만 작년 11월 23일에 연주회를 잡았던 것은 신의 한 수였다.

1년 전이라니...2019.11.23에 열린 “다시 만나는 피아노” 연주회 사진 입니다.

 작년은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에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다. 작년의 오늘은 연주회 직전이었고, 연주회 날 혹시 지나치게 긴장할 것에 대비해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되는 건가 고민하고 있었던 날이다. 청심환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 몸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연주회 당일 아침까지도 결정을 못하고 있다가 액상으로 나오는 청심환을 반 병, 한 병 다 마셨다가 근육이 너무 이완될까 봐, 을 마셨다. 결과적으로 청심환을 먹은 게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다. 긴장감은 좀 누그러뜨렸지만, 이제 와서 하는 고백인데, 두 번째 곡 할 때 나른함이 밀려오면서 살짝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 영향 탓인지 두 번째 곡인 모차르트 소나타의 통통 튀는 맛을 별로 살리지 못했다. 청심환은 긴장도 이완시키지만 감각도 이완시키나 보다.


 올해의 나는 어두워진 시대의 분위기에 걸맞게 목표를 잃은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청심환을 복용한 것처럼 축 늘어진 날들도 많다. 피아노 연주회야 다시 한번 더 해보고 싶지만, 여러 가지 상황상 다음으로 미뤄 두었다. 언제 하겠다는 확실한 목표는 없지만 그래도 연습은 계속돼야 한다는 생각에 일주일에 한 번씩 레슨을 받고 연습을 하고 있다. 2020년은 음악계에서는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지만, 나는 쇼팽의 해로 정하고 쇼팽 곡들만 연습하고 있다. 아무리 엮을라고 해도 2020년과 쇼팽은 연관이 없는데도, 왜 그렇게 쇼팽을 연주하고 싶었을까. 연주회 이후, 간만의 성취감에 들떠 있던 나를 좀 가라앉히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으로 얻은 병은 음악으로 치유해야 하는 법. 쇼팽 특유의 감성이라면 나를 좀 차분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아름답게.


 마음은 차분해도 너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원하던 나 자신을 마주할 시간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코로나 핑계만 대기에는 내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게 자존감이 떨어져 가고 있는 나를 위로하는 유일한 시간은 피아노와 만나는 시간뿐이었다. 하루에 한두 시간, 피아노 앞에 앉는 시간에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쇼팽의 음악이 활기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묘하게 힘이 났다. 그러나 연습하고 있는 쇼팽의 모든 곡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즉흥 환상곡 1번은 정말 포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곡들과 달리 어쩌면 이렇게 발전이 없을까. 녹턴이나 왈츠들은 대단히 흡족할 만큼의 완성도는 아니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쇼팽을 그럭저럭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1번은 도대체가 연습을 하면 할수록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첫마디부터 뭔가 매끄럽지 못하게 시작하는데, 도입부에서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 거냐는 선생님의 질문에도 딱히 대답하지 못했다. 쇼팽의 마음도, 내 마음도 읽지 못하겠다.

피아노의 시인, 쇼팽의 감성을 읽는다는 게 애초에 무리일지도...

 폴란드의 음악학자 훼르디난드 호에직크는 “마치 분수에서 뿜어 나오는 물에 비추어 보이는 밝은 햇빛과도 같은 곡”이라고 했다는데, 머리로는 알겠는데, 도통 그렇게 연주가 되지는 않는다. 네이버를 좀 더 검색해 보니, 이 곡은 상당한 기교가 요구되는 곡이라고 한다. 그럴 줄 알았어,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었어... “즐거운 기분에 젖어 장난치듯 도입부가 시작되어 즉흥적인 듯한 경쾌한 주제를 자유롭게 밀고 당기며 진행된다. 가볍게 지속되는 셋잇단 음표를 연주할 때는 유연하고 가벼운 손목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라는 분석이다. 유연하고 가벼운 손목의 움직임은 말처럼 쉽지 않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 손목을 펄럭 펄럭 아래 위로 움직이면 안 되고 고정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고정이란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적당한 고정을 하려면 당연히 손목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유연하고 가벼운 움직임이 나오기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다섯 손가락의 힘을 이리저리 옮겨 다닐 수 있게 손목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며 사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요즘 내가 가장 많이 지적받는 부분이다.


 지난 레슨 때도, 더 지난 레슨 때도, 선생님은 손목과 손가락 사이의 힘의 이동 관계에 대해 설명했다. 솔직히 레슨 때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라 선생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개선이 안 되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선생님, 이게 저의 고질적인 문제인가요? 어떻게 이렇게 매번 같은 지적을 받으면서도 고치질 못할까요?” “아니에요, 다른 학생들도 그래요. 심지어 줄리어드 다닐 때도 교수님들이 항상 지적한 부분이었어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 얼마나 연습을 하고 노력을 해야 해결할 수 있는 것인지 겁도 났다. 선생님은 정말 기본 중의 기본이라, 기본이 바로 잡혀야 어떤 곡을 만나도 어렵지 않을 거라고 덧붙인다.


 이제 겨우 손가락이 건반 위에 붙었고, 작년에 한참 지적받던 엄지 손가락의 힘도 간신히 빠졌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모든 일이 그렇듯, 기본으로 갖춰야 될 것들이 참 많다. 손가락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으로 힘이 잘 이동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손끝으로 내려 찍으면서 치는 것은 아니고, 손가락의 길이를 조금 더 확장시켜 손목뼈까지 연결시켜서 그것을 하나의 도구로 인식해서 건반을 눌러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말 듯할 거 같은데, 여러분은 아시겠나요. 피아노를 계속 연주할 사람이니까 뭐가 됐든 나는 알아야 한다. 아니 몸으로 완전히 익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래야 다음 연주회를 계획할 수 있다. 그래야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


 지금의 내 삶은 쇼팽의 즉흥 환상곡 1번을 마주하며 고전 중인 연습 시간 같다. 고질적인 문제들과 계속되는 실패, 그리고 그 결과 생기는 좌절은 끊임없이 나를 흔든다. 어쩌면 나는 피아노 연습만큼도 내 일에 대해 진지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표로 달려가는지,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면서 힘들다고 불평은 하지만 좋은 채널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했나. 매주 로또를 사는 것처럼 우연한 대박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유튜브는 나와 맞는 플랫폼이 아닐지도 모른다. 5000원짜리도 당첨돼 본 적이 없는 로또처럼, 유튜브와 나는 별로 인연이 없는 사이인 게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만두면 불안하지 않을까. 모두가 다 하고 있는데, 나만 안 하면 도태되는 게 아닐까. 글 쓰는 일도 그렇다. 작가가 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그래도 글 쓰는 일을 그만두기는 두려워.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세뇌시키면서 아슬아슬하게 도전과 포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흠...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알겠다. 내가 나를 너무 다그치고 있는 건 아닌지, 안 그런 척하면서 성과가 안 나온다고 달달 볶고 있는 게 보인다. 도대체 뭣 때문에 내 자신을 못살게 굴며 피곤하게 사는 걸까. 쇼팽에 빠져 산 1년, 비록 즉흥 환상곡 1번은 환장할 정도로 발전이 없지만 그래도 피아노는 치는 시간 만으로도 위로받고 있잖아. 1번이 유독 어려운 거지, 다른 게 다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유튜브 채널도 구독자수가 하루에 한두 명씩은 늘잖아. 뭐 몇십 명씩 늘 거라고 생각하고 개편한 건 아니잖아. 어차피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만 볼 거라고 생각하고 만든 거잖아. 그래도 준비하면서 공부를 하니 남는 게 있잖아. 예술가의 삶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잖아. 매주 한편씩 남기는 글은 내 끈질김의 증거잖아. 두어 달 뒤면 3년을 꽉 채운 거라고. 글 쓰면서 생각도 정리하고 위로도 많이 받았잖아.


 11월도 이제 다 지나가고, 올해도 한 달 밖에 남지 않았다. 12월까지 파이팅 넘치게 달려보는 것도 괜찮지만, 조금은 느슨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 그렇다고 하던 일을 내려놓고 쉬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안달복달하는 마음을 내려놓겠다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앞만 바라보는 삶을 살아왔던 나니까. 그래도 노력은 해보겠다. 12월 한 달은, 한 달만은, 일단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하는 유튜브 구독자 수부터 신경 쓰지 말자. 작가로서의 가능성이 있는지도 판단하지 말자. 쇼팽의 즉흥 환상곡 1번도 잘 안되면 놓아주자. 내년 1월에 다시 만나면 그때는 잘할지 또 누가 알겠나.


 나의 12월이 기대된다. 시퍼런 눈으로 불편하게 나를 쳐다보던 문제들도 나를 자극하지 않는 무덤덤한 회색빛으로 바뀐 12월이 될 것이다. 마음 졸이지 말고, 어차피 늦은 거 더 천천히 가자. 그래, 그래도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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