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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Nov 29. 2020

박아나의 일상뉴스

오늘의 기록

 2년 동안 나를 가르쳐주었던 피아노 선생님이 멀리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번 주는 <다시 만나는 피아노> 연주회가 열린 지 1년이 되는 주기도 해서 이래저래 피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유튜브 <어나더 리딩>에도 담았다. 그 바람에 작년 이맘때 내가 피아노 연주회 때 가졌던 생각과 감정들을 반추할 수 있었다.


  “손가락 모양이 변하셨어요. 연습 많이 해서 굵어졌어요.” 아... 예전의 내 손가락은 가늘고 긴 느낌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좀 짧아지고 퉁퉁한 느낌적인 느낌이다. 가만히 만져보니 손가락들이 부어있다. 근육이라도 생긴 걸까. 내 뜻대로 쳐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손가락 모양이 변할 정도로 연습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면서 짠하다. 노력했으니까, 그랬으니까. 그걸로 어쩌면 이미 다 얻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른 결의 사람이었나. 이런 감정, 이런 생각들이 꽤나 혁신적으로 다가온다. 아무튼 작년 11월 24일 “연주회 일지 partr1 “에서 분명히 이렇게 썼다.

노력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이미 다 얻었다고 했는데, 지금의 나는 왜 빈털터리 같을까. 과정은 괴롭기만 하고, 성과에 목마른 나는 마음이 급하다.


 좀 더 냉정해지자. 연주회 때 노력했던 만큼 지금 내가 하는 일에 공을 들이고 있는가. 물론 나름 부지런히 한다. 그러나 과연 그 정도 노력만으로 충분할까. 손가락이 부어서 모양이 바뀔 정도, 아니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좀 더 솔직해지자. 지난 연주회 때 얻었던 귀한 통찰들은 깡그리 잊어버렸다고.


 “연주회장에서 연주하다 보면, 정말 오롯이 피아노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그런 집중의 순간이 올 때가 있어요. 그런 모멘트만 경험하면 그걸로 충분한 거예요”  과연 나에게 그런 순간이 올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될까...


 나는 그런 모멘트를 경험했던가. 그 이야기는 연주회를 마치고 작년 11월 30일에 쓴 “연주회 일지 part 2”를 들여다본다.


 피아노 앞에 앉는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긴 한숨과 함께 조심스럽게 첫 음을 누른다. 그럭저럭 순조롭게 연주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생각들. ‘지금 이 순간이 정말 내게 오다니...’ , ‘감개무량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 화양연화인가?’라는 생각에 갑자기 울컥한다. 연주 도중에 눈물이라, 그것은 정말 상상조차 해 본 적도 없기에 일단 평정을 되찾는다... 드뷔시를 드뷔시답게 표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몇 달간 이곡을 붙잡고 있으면서 나만의 분위기를 담고 싶었다. 지금 이 기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래 긴 곡도 아니긴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아라베스크의 시간은 지금까지 이 곡을 연습했던 수많은 시간 중에서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 드디어 마지막 마디. 잠에서 깰까 봐 두려운 듯 건반을 옅게 누르는 손가락, 스르륵 페달에서 떼는 발에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박수 소리가 알람 소리처럼 들린다. 이제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 다시 꺼내보고 싶네요... 사진: 네이버영화

 연주회 도중에 지금이 화양연화가 아닐까 울컥하긴 해지만, 그때 느낀 감격스러움을 표현한 것이다. ‘내가 연주회를 하다니 이건 실화였어...!’ 뭐 이런 종류의 감정 말이다. 어떤 성취를 이뤘을 때, 큰 기쁨을 느꼈을 때, 행복한 감정이 밀려올 때, 지금이 화양연화라고 그 순간 단정 지을 수 있나. 그때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이었는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아챌 수 있는 것인데. 그래도 상상력을 조금 발휘하면 시간을 뛰어넘었을 수도 있다.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게, 마법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니까. 피아노라는 마법이 미래의 내가 느낄 감정을 미리 일깨워 줬을지 누가 알겠나.


 다시 시계를 돌려본다. 꿈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다. 연주가 끝나고 이어진 토크 시간에 내 감정과 생각들을 정리할 기회가 주어졌다. 마지막 질문이었던 이 질문이 결국은 내가 연주회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연주회를 통해 주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15년의 아나운서 생활 동안 얻은 것도 물론 많았지만, 정작 나라는 사람은 없었던 시간이었어요. 퇴사를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이런저런 도전과 연주회까지... 잘 되지 않은 것들도 많고,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좀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이번 연주회는 누군가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기보다는 그런 제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드네요.”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다만 나를 사랑하는 마음, 나를 아끼는 마음보다는 나의 모자람과 부족함에 실망하며 소중한 하루하루를 감정적으로 낭비하고 있다는 거. 그게 다른 점이랄까. 나를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 마음은 어디로 간 걸까. 맛있는 음식을 갈구하고, 멋진 옷을 탐낼 때만 그런 애정이 솟아나는 것일까. 나는 어디로, 누구를 향해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까.


 지난번 글에 이어 나를 들볶으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내가 어디쯤에 와있는지 기록을 남기는 차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시간이 좀 더 지난 후에, 2020년의 내가 2019년의 내게 그랬듯이,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내년에 이 글을 펼치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때의 나는 어떤 생각으로 지금의 나를 바라보게 될까, 궁금하지 않은가. 작년 연주회 때 글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때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나는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흐릿한 흔적들은 붙잡고 살고 있었겠지만, 지금의 내겐 선명한 증거가 필요하다.

유튜브 <어나더 리딩>에도 확실히 기록을 남겨두었어요. 궁금하신 분들은..  https://youtube.com/c/legatopark 에서 확인하세요^^

 어쩌면 별거 아닌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요즘, 이렇게 글도 쓰고 생각도 정리할 여유까지 있으니 지금의 상황이 과연 나쁘기만 한 것일까, 괜히 머쓱해진다. 지금의 나보다 미래의 나는 나를 더 사랑하길 바라며 지금의 나는 오늘을 기록한다. 너의 하루를 더 소중하게 보내라고, 너를 좀 더 사랑하라고, 너에게, 아니 내게, 이미 수만번의 메시지를 보냈고, 보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눈물나게 든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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