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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Nov 01. 2021

코로나 시대의 해외여행 + 어학연수

뉴욕행 일기 2

 오랜만의 긴 비행이어서 그런지 비행기 안에서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저녁 비행기였으면 그나마 나았을 텐데, 아침 10시 비행기라 너무 초롱초롱한 눈으로 비행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이러다가는 도착해서 꽤나 피곤한 시간을 보낼 게 분명하지만, 흥분된 나의 마음을 누르기엔 역부족이었다. 식곤증이나 알코올의 효과를 기대하며, 기내식을 꼬박꼬박 챙기며 와인도 마셨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어느 순간 나는 자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음악을 들으며 글도 쓰고, 영어 공부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기내 영화는 볼만한 영화들이 없어서 패스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영화 셀렉션도 별로였다. 신작 영화라고 주장하는 낯선 오랜 영화들 뿐이었다.

 뉴욕에 곧 도착한다는 기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창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뉴욕이 보이기 시작한다. 뉴욕… 왔네. 이렇게 비행기만 타면 올 수 있는 거였네… 병상이 부족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 뉴욕 주지사가 락다운을 선언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뉴욕에 다시 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그랬다. 그러나 행복이 영원하지 않듯 불행도 영원하진 않았다. 이렇게 내가 뉴욕을 다시 찾아올 수 있게 될 정도로 나도, 뉴욕도 회복 중이니까.

 한숨도 못 잔 사람 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입국심사대까지 날아왔다. 뉴욕의 입국심사는 무한 짜증을 유발하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내겐 복불복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곳이기도 하다. 일단 입국 심사관들이 긴 비행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서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 할 의무도 없지만, 뭐랄까, 도의적으로 좀 빨리 처리하면 좋을 것 같은데, 참으로 느긋하다. 자기들끼리 농담을 하거나 슬로 모션을 건 것처럼 서류를 들춘다. 예전에 비해 입국하는 사람들이 줄어서 근무하는 인원도 확 줄였는지, 이번에는 딱 두 명이 일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도 물론 본인의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었겠지만, 내 눈에는, 나와 함께 줄을 선 다른 외국인 입국자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빽빽하게 줄을 선 입국자들은 몸을 비비 꼬며 다리나 떠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단순히 지루하기만 하면 뉴욕이 너무 재미없어진다. 뉴욕의 입국 심사 과정에는 상당히 예측할 수 없는 운이라는 게 작용한다. 순서라는 것이 약간의 창조적 의미를 지닌달까. 무슨 말이냐 하면, 비행기에서 1등으로 내렸다고 해서 반드시 1등으로 입국심사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줄을 서면 몇 번 심사관 앞으로 가라고 지시하는 직원이 있는데, 이 직원의 판단에 따라 더 일찍 나갈 수도 있고, 더 늦어질 수도 있다. 갑자기 뒷줄에 선 사람들에게 미국 여권을 가진 사람들이 통과하는 심사대(당연히 외국인 심사대와 분리돼 있고, 이쪽은 심사관 수도 많음)로 가라고 지시하거나 외교관이나 항공사 직원들이 통과하는 심사대로 가라고 배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불복이라는 거다.

 아무튼 이번에는 예전에 비해 입국자수가 훨씬 줄었고, 막판에 항공사 직원들이 이용하는 심사대로 보내져서, 세상에 고맙게도, 그나마 수월했다. 일들 좀 열심히 할래, 안 할래 하는 눈빛으로 서있다가 심사관 앞에서는 세상 친절하고 무해한 미소로 돌변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어렵게 왔는데 입국 거부라도 당하면 나만 손해 아닌가. 친구 만나러 왔다고 말했다가 예전에 재심사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 그 뒤로는 좀 쫄게 된다. 근데 뭐가 문제였을까. 친구 만나는 게? 아니면 여자 혼자 온 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방문 목적을 묻는다. 2주는 영어 어학연수를 받고, 나머지 기간에는 관광을 할 거라고 당당히 이야기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통과했다.

 솔직히 이 코로나 시국에 자가격리 없이 뉴욕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게, 아니 여기 입국심사대에 와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더럽고 치사하다는 마음은 이번엔 딱히 들지 않았음을 분명히 해둔다. 부칠 때 멀쩡했던 내 가방 한쪽이 찌그러졌지만, 그것도 괜찮다. 택시 잡을 때 웬 인도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던지며 새치기했지만, 그것도 괜찮다. 모든 게 다 괜찮다.

 맨해튼 시내에 있는 호텔에 무사히 도착했다. 나중에 학교가 있는 Tarrytown으로 가기 위해 그랜드 센트럴 역 근처에 잡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큰 짐을 끌고 기차를 타고 역에서 내려 10분을 걸어가기는 무리여서 우버를 부르든지, 뭔가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편이 나았다. 원래는 공항에서 내리면 학교에서 제공하는 픽업 서비스가 있는데, 나는 시차 적응을 핑계로 수업 시작일보다 며칠 일찍 도착했다. 일종의 현지 적응 훈련이랄까. 너무 오랜만에 나온 외국에, 갑작스러운 영어 공부는 내 나이에 무리다.

 짐을 방에 두고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눈꺼풀이 몹시 무거웠지만, 침대에 누워 잠시 쉴 마음은 전혀 없었기에 한국에서 가져온 고농축 비타민 앰플을 입속에 털어놓고 밖으로 나갔다. 42번가에서 서쪽 방향으로 피프스 애비뉴를 향해 걸었다. 대각선 방향으로 브라이언트 파크와 뉴욕 공립 도서관이 보이자 오른쪽으로 꺾어 피프스 애비뉴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올라갔다. 익숙한 브랜드들이 눈에 들어온다. Urban Outfitters, Tommy Bahama, Adidas는 그대로,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긴 Lululemon, 그리고 Lego store도 살짝 위치가 바뀌었다. 록펠러센터의 아틀라스는 여전히 피프스 애비뉴를 지키고 있었고, 맞은편에 Saks Fifth Avenue 백화점도, 그 옆에 세인트 패트릭 대성당도 굳건히 그 자리에 있었다. 패트릭 성당 안으로 오랜만에 들어갔다. 나는 그곳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코로나 팬데믹 시국에 여기 온 것에 대한 감사와 함께 이번 여정이 무사히 끝나길, 그리고 모두가 건강하길, 팬데믹이 얼른 끝나길, 마음을 모아 기도했다. 여기 온 많은 관광객들이 비슷한 내용의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모두의 마음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본다.

 여기 패트릭 대성당이 있는 50번가는 내게는 너무 익숙한 곳이다. 나는 8번 애비뉴의 50번가에 살았기 때문에 동쪽으로 몇 블록만 건너오면, 빠른 걸음으로 5,6분이면 여기 올 수 있었다. 이제는 10년 전의 일이고, 그사이 뉴욕에 이런저런 많은 변화가 있어 있던 상점들도 사라지고 새로 생기기를 여러 번 반복했지만, 그래도 50번가가 주는 특유의 분위기는 그대로여서 다행이었다. 바로 아래쪽에 있는 타임 스퀘어의 번잡함보다는 정돈된, 그러나 여전히 외지인과 뉴요커들이 혼재하는, 특유의 생기가 있는 거리. 나는 그 생기를 좋아했다. 그들만의 세상 같은 어퍼 이스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뭐랄까, 편안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나 같은 이방인들에게 한정된 편안함. 그리고 팬데믹의 어느 지점에 서 있는, 지금의 50번가도 여전히 그렇다.

 오랜만에 오는 뉴욕이라 대단한 일정이나 계획을 세우고 왔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다. 뉴욕에 갈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압도돼서 디테일한 것들은 그냥 무시했나 보다. 어디로 가야 하지? 성당에서 나와 잠시 주춤거리다 51번가, 52번가의 횡단보도를 빠르게 건넜다. 뉴욕의 횡단보도는 흐름이라는 게 있다. 이 흐름을 놓치면 횡단보도마다 신호에 걸려 낭패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끔은, 솔직히는 상당히 자주, 빨간 신호등일 때도 길을 건너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위험한 일이지만, 맨해튼은 일방통행 길이 많아서 한쪽만 체크하면 되고, 성질 급한 뉴욕의 운전자들도 사람에게는 양보를 잘하기 때문에 당장 차가 달려들지 않을 만큼 여유 거리가 확보되면 누구라도 할 것 없이 길을 건넌다. 이 흐름을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잘 타느냐가 뉴요커와 관광객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눈치 빠른 관광객은 금방 이 흐름을 이해하고 선도하는 경지에 이르기도 하지만. 신호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바쁘냐고 묻는다면 글쎄… 바빠야, 아니 바빠 보여야 뉴요커 아닐까. 미국의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니, 뭔가 고유한 특성으로 인정해야 될라나.

 아무튼 나도 슬슬 발동이 걸리시 시작한다. 돌아온 옛날 뉴요커, 이대로 계속 리듬에 몸을 맡겨 볼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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