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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아나 Oct 29. 2021

코로나 시대의 해외여행 + 어학연수

뉴욕행 일기 1

“나 뉴욕 가.”

 겁 많고 예민한 내가 뉴욕에 간다고 하니 다들 놀란다. 사업상의 이유로, 혹은 가족이 외국에 있는 경우에는 모르겠는데, 이 코로나 팬데믹 와중에 해외로 간다고 하니 신기한 모양이다. “내 주변에서 해외 간다고 하는 사람 네가 처음이야.” “부럽다, 근데 괜찮겠니?” 대부분의 반응은 이랬다. “나도 내 주변에서 내가 처음이야.” “나도 떨려,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돼.” 나의 대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여행은 사실 1년 반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나는 원래대로라면, 그러니까 코로나라는 게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작년 봄에 런던에 갈 예정이었다. 여행이야, 국내에도 좋은 곳이 많지만, 어학연수를 겸한 여행이었기에 영어를 쓰는 나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 나이에 웬 어학연수냐. 누군가에게는 영어 그까짓 게 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게 영어는 늘 신경이 쓰여왔던 걸로 보면 그까지 것 이상의 존재였다. 연수까지 떠날 정도로 절박한 이유는 없지만, 나의 상황은 이랬다. 10년 전 뉴욕에 살았을 때 어느 정도 괜찮았던 영어 실력이 써먹을 데가 없으니 녹슬어 갔다. 영어로 된 문장이 아랍어처럼 느껴지던 어느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영어 연수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기간은 3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영어가 늘면 얼마나 늘겠냐만은 집에서는 좀처럼 영어 공부에 올인하지 못하는 나약한 내 정신 상태를 고려할 때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 확실한 장치가 필요했다. 돈과 시간을 쓰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영어와 다시 친해지겠지 하는 양심 같은 것에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런던에는 내가 좋아하는 뮤지엄에, 클래식 공연장에, 문화적으로도 충분히 즐길거리가 많아서 여러 가지 면에서 이득일 것 같았다. 영어와 문화연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 나는 완전히 설득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바이러스가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세상을 점령해 버렸다. 2020년 초.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한국은 신천지 사태로 난리도 아니었고, 영국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확진자 수로 폭발 일보직전이었다. 거기에 아시안 헤이트 범죄까지 심심치 않게 일어나며 4월 초에 떠나기로 했던 나의 일정은 그 뒤로, 그리고 더 뒤로 연기되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간이 와버렸다. 2021년 안에는 어떻게든 연수를 떠나든지, 아니면 아예 마음을 접든지, 결정을 해야 했다. 백신이 나오면서 일상으로 돌아갈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상황이 악화되는 일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작년 언젠가, 아님 올해라도 이 지긋지긋한 팬데믹이 끝날 거라는 믿음 하나로 버텨왔는데,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점점 나를 지배하였다. 인정하기 싫지만 ‘위드아웃 코로나’는 없을 것이고, ‘위드 코로나’라는 허울 좋은 표현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선택지였다.

 어차피 계속 이럴 거면 나는 나대로의 삶을 사는 게 맞지 않는가. 언제까지 상황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하는가. 나는 내가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고심 끝에 한참을 미룬 연수를 가기로 결정하고 용감하게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대신 목적지는 변경했다. 런던이 아닌 뉴욕으로. 뉴욕에 매년 갔던 내 기준으로는 팬데믹 때문에 한참을 못 간 뉴욕에 가고 싶어졌다. 어쨌든 내겐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니까 별다른 연고가 없는 런던보다는 애틋함이 훨씬 크지 않겠는가. 게다가 익숙한 뉴욕에서는 무슨 일이 생겨도 덜 겁이 날 것 같기도 했고.

 해외로 나가는 모든 과정은 무척 낯설었다. 뉴욕행 비행기를 결제하는 과정도, esta 비자를 받는 과정도, 예전에는 아무 거리낌 없이 했던 일들이 시간이 두배 이상 걸리고 제대로 한 건지 몇 번을 확인해야 했다. 거기에 코로나로 인한 각종 서류를 추가로 더 챙겨야 했다. 백신 접종 완료 영문 증명서를 출력해야 했고, 출국 전 72시간 내에 받은 코로나 검사의 음성 확인 증명서도 필요했다. 미국 입국하는 데는 신속항원검사면 가능한데, 결과가 나오는 데 하루가 걸리는 pcr 검사에 비해 한 시간이면 결과가 나오고 검사비도 훨씬 더 저렴했다. 고맙게도. 그러나 검사방식은 pcr과 같았다. 검사 자체가 처음이었던 나는 무척 겁을 먹고 갔다. 누군가가 뇌가 뚫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 아예 아픈 쪽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숨을 내쉬면서 받으면 좀 수월하다는 조언이 효과적이었을까. 그냥 기분만 좀 나빴다.

 원래 여행 전에 이래저래 바빠지는 법인데, 코로나 검사까지 받으러 다니니까 더 정신이 없었다. 짐을 싸야 하는데, 뭘 넣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코로나 시대의 여행은 옷이나 화장품보다 먼저 챙겨야 할 것들이 있었다. 마스크도 한통을 더 샀고, 손세정제에, 손 소독 티슈도 챙겼다. 이것저것 넣다 보니 자꾸 짐이 늘었다. 팬데믹 시대의 여행은 여행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짐도 부풀어 올랐다.

  이제껏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은 팬데믹의 긴 터널을 거치면서 이미 깨달은 지 오래다.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한 사실이 남아 있었다. 공항 가는 길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말이다. 내가 주로 이용하던 공항버스란 이제 더 이상 운행되지 않았다. 일부 구간에 운행하는 버스도 있다고는 하는데, 그것은 하루에 한두 번 정도로, 시간을 맞추기도 어렵고, 우리 집 바로 앞에 있는 공항버스 정류장에 정차하는 버스도 아니다. 공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택시나 자가, 공항 철도를 타는 것이다. 공항 철도를 타려면 9호선을 타러 가야 하고, 그리고 공항철도로 다시 갈아타야 되는데, 이제는 모든 정류장에 다 서기 때문에 예전 같은 메리트는 없었다. 택시요금은 너무 비싸서, 이용객이 없어서 예전보다 훨씬 더 올랐다고 한다, 결국 남편이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랜만에 떠나는 먼길이니만큼 배웅을 제대로 해주고 싶다고 따라나서는 남편에게 고마웠다. 새벽 6시에 공항으로 출발해 거기서 바로 출근해야 하는 남편에게 조금 미안했지만, 말리진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공항 가는 길이 너무 험난할 것 같아서였다.

 편히 공항에 도착한 나는 코로나 이전과는 달리 무척 한산한 공항의 공기를 맡으며 입국장으로 들어갔다. 면세점들이 예전 모습 그대로 반짝반짝 빛나며 탑승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전시회장의 그림처럼 감상만 해야 될 것 같았다. 늘 북적였던 공항 라운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그래도 비행기를 타려고 여기 앉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음식 종류가 줄어들었지만, 그런 변화에 감히 불만이 생기지는 않았다.

 보딩 타임이 가까워져 게이트로 이동했다. 게이트 앞에 탑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하루에 두 번 뜨던 뉴욕행 비행기가 하루 한 번으로 운항 횟수가 줄었는데도 만석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마일리지를 이용해서 비즈니스 자리에 앉았는데, 오히려 그쪽에만 사람들이 몰려있었고, 이코노미석에는 사람이 훨씬 더 없었다. 누워서 타고 갈 수도 있을 정도로. 평일임을 감안해도 그렇다.

 비행기 타기 직전 연결통로를 지나가는데, 마치 판문점이라도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보통 여기서 사진을 찍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사진으로 남겼다. 스튜어디스들이 나를 반겨주는데, 나도 정말 진심 반가웠다. 자리에 앉아서도 이것저것 만지작 거리며 신기해했다. 마치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것처럼. 충전을 어디에 해야 되는지, 헤드폰을 어디에 꽂아야 하는지 한참을 찾고 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 “저희 비행기 이제 곧 출입문 닫습니다.” 드디어 출발인가. 약간의 전율이 느껴진다. 설렌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 기분. 조금 두렵지만 엄청 기대되고, 그동안 나를 옭아맸던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그런 느낌을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새로운 세계로 떠나지만, 그것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시작인 것을. 그렇게 나는 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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