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그림을 보러 갑니다> 2번째 이야기
니나 프루덴버거의 책, <예술가의 서재>에는 책을 사랑해서 책을 모으는 작가, 디자이너, 편집자들의 서재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에 대한에 대한 애착(혹은 집착)과 욕심이 많은 이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은 책에 온통 둘러싸여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서재를 따로 갖춘 것은 물론이고 거실이든, 침실이든, 화장실이든 집의 모든 공간이 크고 작은 서재들이다. 서점 수준의, 그 이상의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고 심지어 버리는 것조차도 힘들어하는 그들은 미니멀리스트라기보다는 맥시멀리스트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일까. 그런 그들의 공간에는 그림과 조각품들 역시 꽤나 많이 포착된다. 디자이너의 거실 소파 뒤로, 건축가의 책상 옆으로, 원화와 포스터들이 나름의 질서를 구축하며 벽면을 도배하고 있다. 빽빽한 책 사이 잠시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에도 아기자기한 조각품들이, 작은 액자들이 빼꼼하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벽 전체나 집안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예술 작품에 내어줄 마음까지는 없더라도 나의 집, 나의 공간의 어느 빈 곳을 그림으로 채우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요즘같이 너도 나도 그림에 관심이 넘치는 시절에는 그림 한 점 없는 내 공간이 측은해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내 침대 옆 작은 협탁 위도 좋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딱 보이는 자리도 괜찮을 것 같다. 거실에 TV를 치우고 그 자리에 그림을 건다면 우리 집 분위기가 한층 업그레이드되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고르려고 보니 세상에 작가도 많고 작품도 너무 많다. 마크 로스코 풍의 추상 작품들도 멋지고, 한국 단색 화가들 작품을 보니 기품 있어 보이고, 통통 튀는 팝아트 느낌도 쿨하고… 도대체 내 취향이 뭔지 나도 궁금할 지경이다.
집에 그림을 드리려면 내 취향부터 알아야 된다. 여기서 말하는 취향이라 함은 딱히 그림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내 인테리어 취향을 통해 그림에 대한 취향도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회색 계열의 대리석 바닥으로 도시적이고 차가운 느낌인지, 아니면 우드톤으로 충만한 내추럴하고 따뜻한 느낌인지. 가구들은 심플한지, 혹은 빈티지풍인지. 집의 전체적인 메인 색감은 무엇인지도 파악해 본다. 주거의 형태도 중요하다. 현대식 아파트인지, 정원이 있는 주택인지, 이 모든 것들의 내 취향과 관련이 있다. 뽀로로 매트와 장난감이 나뒹굴고 있는데 취향이라는 게 있을까 싶다면 옷 스타일은 어떤지 살펴보자. 무채색톤으로 단정한 스타일인지, 디자인이나 색깔이 튀는 것을 좋아하는지. 럭셔리 브랜드 옷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나만의 개성이 담긴 옷들을 믹스 매치하는지. 이 모든 것들이 그림의 취향과 연결된다.
그림이라는 것은 내 취향의 결정판이라서 소장한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이 그려지기도 한다. 미술 애호가로 유명한 방탄소년단의 RM은 평소 윤형근 화백의 작품처럼 한국의 정서가 가득 담긴 단단하고 묵직한 느낌의 작품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의 컬렉션을 접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팬이 아니라도 짐작이 간다. 이와 반대로 그림은 평소의 내 취향과는 아주 다른 선택이 가능하다. 배우자를 결정할 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면에 끌리는 것처럼, 그림도 나의 취향과 다른 반전의 매력을 가진 그림에 얼마든지 끌릴 수 있는 것이다. 블라우스 위에 브로치나 가방의 참 장식처럼 그림을 포인트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취향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시도를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흰 벽에 밝은 오크 원목 마루로 깔끔하고 현대적인 느낌의 가구들로 채워져 있는 거실을 상상해 보라. 이런 공간이라면 흑백의 멋이 살아있는 이배 작가님 작품이 취향저격일 것 같은 이 공간에 옥승철 작가의 클로즈업된 얼굴 도상이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평소 추구하는 스타일과 다른 취향의 그림을 선택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내가 원하거나 부족한 기운을 그림을 통해서라도 받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런 강렬한 에너지가 내게도 있어…라고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구일까. 아무튼 그림 하나에 내 취향과 바람이 공존한다. 그러고 보니, 인물화를 주로 그리는 지인 작가에게 샛노란 해바라기 그림을 그려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는 어느 사업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풍요와 번영을 바라는 마음, 우리의 진짜 관심사가 그림에서 보이기도 한다.
취향을 파악했다 해도 실제로 내 집에 어울리는 그림을 잘 고르는 일은 운동화를 사는 것과 아주 다른 문제다. 운동화야 마음에 안 들면 당근 마켓에 보내버리면 되지만, 그림은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내게 맞는, 좋은 작품을 고르는 안목이란 게 필요하다. 그림을 보는 안목은 전시회를 자주 다니는 방법이 최고지만, 이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갤러리 투어를 다니다 보면 현재 어떤 그림들이 많이 그려지는지, 어떤 색이 더 좋은지, 어떤 도상이 더 마음에 드는지, 자기만의 눈이 생긴다. 그러다 우리 집에 걸어보면 어떨까 싶은 작품들이 하나둘씩 생기게 되는데, 그게 결국 취향이고, 안목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우리가 제일 원하는 안목은 앞으로 더 성장할, 그러니까 몸값이 더 오를 작가들을 가려내는 눈이다. 신인 작가들의 경우 경력이 짧기 때문에 보편적인 검증이 부족하다. 순전히 내 감을 따라야 하는데, 녹록지 않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보다는 내 안목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쯤에서 드는 생각, 본인의 공간을 위해서 그림을 꼭 사야만 하는 것일까?
그런 개념에서 등장한 것이 그림 렌털 서비스다. 그림도 빌릴 수 있다는 신박한 아이디어로 시작해 소비자들의 공간을 아름답게 업그레이드시켜주고 있다. 그림을 주기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니 내 집인데 내 집 같지 않은 새로움을 누릴 수 있다. 거기에 “내 취향이 이런 거였어?” “우리 집엔 이런 그림이 딱이네!” 취향의 발견은 덤이다. 작품을 인테리어의 한 요소로만 본다면 이 서비스가 무척 효율적이긴 하지만, 작품의 의미를 다른 데서 찾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가 온전히 내 소유가 되어, 내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나와 같이 숨 쉰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작품이라고. 다른 사람들과 나눴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될 작품은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일 뿐이다. 누군가의 집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그림은 태생부터 특별하지 않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렌털 서비스는 가성비 측면에서 여전히 매력적인 선택지이다.
그림의 크기도 취향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림을 걸고 싶은, 그러니까 염두에 두고 있는 공간의 크기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공간에 여유가 있거나 당분간 이사 계획이 없다면 100호 이상의 큰 그림도 욕심을 내볼만한다. 공간에 확실한 포인트를 주고 싶을 때는 100호 내외의 그림을 추천하지만, 그림이 커질수록 공간을 지배하는 힘이 상당하다. 거기에 나중에 처분하거나 보관해야 하는 경우, 혹은 그림의 위치를 바꾸어 달고 싶을 때를 생각하면 더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큰 그림보다는 작은 그림이 여러 가지 면에서 부담스럽지 않기 때문에 입문자라면 20호 이하의 작은 그림을 추천한다. 작은 그림도 여러 개를 같이 걸면 큰 그림 못지않은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데, 서로 너무 다른 종류의 그림들은 오히려 산만한 인상을 줄 수 있으니 주의하는 게 좋다. 이럴 때는 색상을 비슷한 계열로 통일시키거나 같은 액자 프레임으로 맞추면 나름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마지막 체크 포인트로 아이들 방에 그림은 어떤지 점검하자. 예전에는 아이들 방이라면 귀여운 캐릭터나 만화 같은 느낌의 알록달록한 그림들을 선호했다면 이제는 아이들 방의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감성적인 느낌의 그림들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 단순히 아이들 방의 인테리어에 맞는 그림을 찾고만 있는가. 아이들 교육을 신경 쓰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왕이면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에 도움이 되는 그림들을 찾아보면 어떨까. 어렸을 때 눈으로 보고 경험했던 것들이 결국은 본인의 취향과 감각의 발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방에 있는 양질의 작품을 통해 얻는 시각적 자극과 창의적 영감이 얼마나 클지 상상해 보았는가. 미술 학원에 보내는 것만큼이나 아이의 방에 어떤 그림을 둘 지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다고 완전히 어른 취향의 어려운 작품을 두라는 뜻은 아니다. 아이의 눈높이도 고려하면서 색이나 구성이 훌륭한 작품이면 어떨까. 굳이 비싼 원화 작품일 필요도 없다. 웨인 티보의 사랑스러운 디저트 시리즈 포스터만으로도 내 아이의 성향까지 왠지 사랑스럽고 부드러워지기에 충분할 것 같으니까.
그림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취향과 안목도 발전하고, 그에 따라 공간도 진화한다. 유행이나 흐름을 좇기보다는, 나의 취향에 맞는, 혹은 어긋나더라도 재밌는 그림들을 탐색하고 모으는 재미를 느껴보면 어떨까.
# 여성 조선 8월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제목은 브런치용으로 따로 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