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긴장 한 스푼

by 박아나

“방송에서 한국어, 어쩜 그렇게 잘해요?” “생방송이면 긴장해서 못해요. 화장실 가고 싶어 질 것 같은데...” 방송인 사유리의 말이다. 엉뚱하고 당찬 모습의 그녀기에 긴장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생방송이 주는 부담감과 압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물론 예외의 경우도 있다. 손석희 앵커가 그렇다. “저분은 분명 타고나신 것이야, 긴장을 즐기고 있어,”라고 중얼거리며, 경이로운 눈으로 그의 뉴스를 시청한다. 한때 나도 뉴스를 전달했던 사람으로서 ‘긴장을 덜했더라면, 방송을 더 잘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 뉴스 할 때 제일 어려운 부분이 긴장 관리였으니까.

손석희 앵커. 이런 분을 선배님으로 부를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사진: 파이낸셜 뉴스

방송사에 입사하기 전에는 떨릴 일이 없었는데, 이 일을 업으로 삼고 나니 가슴이 콩닥콩닥 해지는 아찔한 순간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한번은 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상정으로 갑작스레 특보에 들어가야 했다. 대부분의 특보가 그러하듯, 상황이 어디로 흘러갈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날은 특히 더했다. 현장 연결도 매끄럽지 않았고, 뉴스룸도 우왕좌왕했다. 진행자인 나도 뭔가 덜컥거리는 불안한 느낌 속에 어찌어찌 방송을 마무리하는가 싶었는데... 잔뜩 긴장했다가 긴장이 풀리면서 혀가 꼬였는지, 클로징 멘트를 “뉴스를 마칩니까?”라고 한 것이다. 아...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는데, 얼굴을 들고 싶지 않았다. 그 뒤로 뉴스 할 때마다 그날의 긴장이 몰려와 한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mbc 뉴스 투데이, 기상 캐스터로 투입된 조세호씨. 갑작스런 출연으로 방송 직전까지 조마조마했지만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니 긴장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미디어스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나만 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클래식 음악 세계에도 긴장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나간 한 바이올리니스트는 1차 라운드가 제일 떨리고 긴장되는데,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1차에서 너무 긴장해서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했다며, 아직도 긴장의 여운이 남아있는 얼굴로 인터뷰한다. 그냥 공연도 아니고, 경연이면 얼마나 더 긴장될까. 그리고 떨려서 실력 발휘를 제대로 못하면 얼마나 또 안타까울까. 심사를 맡은 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예전에 콩쿠르에 나갔을 때 엄청 긴장한 나머지 첫음이 ‘뚜뚜뚜뚜’하며 끊어지는 소리가 나서 당황했다고 한다. 그래도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연주를 계속해서 결국 1등을 했다고 하니 참 대단하다. 그러나 말이 쉽지, 한번 긴장이 시작되면 그것을 극복하는 일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떨지마! 난 잘 할 수 있어!” 주문도 외우고, 기도도 해보지만, 한 번 떨린 가슴, 멈추기가 쉽지 않다. 긴장해서 실수하고, 실수해서 긴장하는 일이 무한 반복. 어느 순간 무대가 두려워진다. 그러다 무대를 떠나는 음악가들도 있겠지.

콩쿠르 부자, 피아니스트 선우예권은 반클라이번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주변의 응원도 스트레스로 다가와 지인들의 연락을 끊었다고... 역시 콩쿠르의 압박은 엄청나다.사진 :NEWS1

우리에게 괴짜로 알려진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도 무대를 떠났다. 그는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최전성기를 누리다가 돌연 무대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 이후에는 레코딩에만 전념한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데는 그의 신경 쇠약에 가까운 예민함이 크게 작용했다. 콘서트에서 발생할 수 있는 돌발적인 상황들, 예를 들어 관객의 기침 소리가 무척 거슬렸을 수도 있고, 콘서트 무대가 바뀔 때마다 새 피아노에 적응하는 일이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스트레스였다. 실제로 굴드는 건강 문제에 아주 예민해서 남과 악수하는 것도 꺼렸고, 자기 피아노에 대한 집착도 강했다.

몸을 구부려 낮은 자세로 연주했던 글렌 굴드, 피아노와 대화라도 나누는 걸까. 실제로 연주하면서 흥얼거리거나 소리를 내서 레코딩 엔지니어들을 힘들게 했다. 사진:대전일보

무대 공포증 때문에 무대를 떠난 것은 아니지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상황에 뭐가 됐든, 그도 불편한 긴장 상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 그에게서 일종의 긴장 대처 방법을 배운다면 이런 게 아닐까. 긴장이 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환경이 새로워서, 거기에 적응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라고 내 탓이 아닌 상황 탓으로 돌리자. 굴드처럼 호텔 객실의 온도가 잘 맞지 않아서, 새 피아노가 나랑 코드가 안 맞아서, 기침하는 관객들이 너무 거슬려서... 이유를 만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이건 순전히 상황 탓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면 편해진다. 나는 문제가 없다. 내가 부족해서, 내 그릇이 작아서 떨리는 게 아니다. 이럴 때만은 남탓으로 돌리는 게 제일 편한 처방전이지 않은가.


천성이 착해서 도저히 남탓이 안되거나 도대체 그게 무슨 해결책이냐고 항의하는 분들을 위해 줄리어드에서 연주자의 긴장 관리법에 대한 특강으로 갈음하겠다. 여러 논문을 요약한 인쇄물을 받았는데, 긴장 관리 문제가 연주자들 사이에서 꽤 중요한 이슈임을 알 수 있었다.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니 받아들이고, 그걸 좀 줄여서 연주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조절하자는 게 수업의 목표였다. 실제로 리사이틀을 앞둔 연주자라고 생각하고 피아노 앞까지 걸어 나와서 의자에 앉기까지 과정을 두 가지 버전으로 실험해 봤다. 한 번은 그냥 피아노로 돌진해서 바로 시작하고, 그다음에는 나오기 전에 스트레칭을 하고 의자에 앉아서는 심호흡을 하며 시간을 좀 가진 후 연주를 시작했다. 실험 결과, 후자가 마음이 편해지고 연주 실력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모든 참가자가 경험했다. 우리가 흔히 하는, 특별할 것 없는 스트레칭과 심호흡이 무대에 서는 피아니스트도, 생방송을 앞둔 아나운서도, 발표를 앞둔 학생의 긴장을 한 스푼 정도 덜어주고 있었다.

긴장은 덜어내고, MSG 한 스푼 넣어볼까. 사진 : MBN

새로운 환경에 놓이면 누구나 긴장한다. 그냥 받아들이자.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가지는 기분 좋은 떨림이라면 언제나 환영이다. 약간의 긴장은 일상에 묘한 활력을 주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한 이유도 그런 긴장 상태가 그리웠던 것일지도. 그렇다고 뉴스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뉴스를 하던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대신 긴장은 한 스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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