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클래식 타임

by 박아나

맹모삼천지교라고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는 고사성어가 있다. 인간의 성장에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만약 맹자의 어머니가 뉴욕에 왔다면 어디에 정착했을까? 이렇게 번잡한 데서 아이 교육을 어떻게 시키냐고 이사 갈지도 모르겠지만...


맨해튼에서 내가 살았던 곳은 미드타운 웨스트 지역이었다. 뉴요커 언니가 여기라면 어딜 다녀도 편하다고 추천해준 동네였다. 이사 와서 보니 진짜 그랬다. 우리 집은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공연장과는 물론, 클래식 공연장인 카네기홀이나 링컨센터와도 가까운 곳이었다. 집 앞에 지하철이 바로 있지만, 굳이 탈 필요가 없었다. 오페라 같은 공연은 공연 시간 자체가 워낙 길어서 끝나고 나면 거의 11시가 넘는데, 늦은 밤 혼자 걸어와도 무섭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 덕에 나는 부담 없이 공연장을 자주 가서 수많은 공연들을 즐길 수 있었다.

링컨센터, 여기 참 뻔질나게 다녔다.

귀호강만 한 게 아니다. 나는 링컨센터에 위치한 줄리어드 스쿨에 일반인을 위한 피아노 클래스도 등록해서 2년을 꼬박 배웠다. 피아노가 집에 없어서 연습도 줄리어드 스쿨에서 했다. 만약 내가 학교와 멀리 떨어진 로어 이스트 사이드 지역에 산다든지, 아님 맨해튼을 벗어나 뉴저지나 브루클린에서 살았다면 좀 망설였을 것이다. 가까우니까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맹자 어머니 친구라면 내가 살았던 지역을 추천하겠다. “음악가 어떠니? 네 아들 조성진이나 랑랑 같이 될지도 몰라.”


그나저나 나는 날씨도 아직 추운데 굳이 지금 뉴욕에 왔을까? 빈 필하모닉 공연을 비롯해 유명 연주자의 공연들이 주로 이맘때 몰려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공연 시즌이 10월 초에 시작돼서 그다음 해 5월 정도면 대충 마무리된다. 아마 날씨 좋은 때는 밖에 나가서 놀라는 뜻인가 보다. 물론 여름에 야외 공연들도 많이 열리니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뉴욕에 도착한 다음날 빈 필하모닉 공연을 보러 카네기홀에 갔다. 공연 분위기 낸다고 와인 한 잔 마시고 싶지만 아직 시차 적응도 안된 상황이라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예전에 와인 한 잔에 낭패를 봤던 베를린 필 공연을 잊지 말자. 고개 숙인 여자였지. 정말 경청하고 싶었는데, 정말 그랬는데... 이번 빈필의 지휘는 LA 필하모닉의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 멋진 조합이다. 빈필의 연주는 늘 그렇듯이 나무랄 데가 없었다. 찰스 아이브스의 교향곡은 힘이 넘쳤고,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은 섬세했다. 파도가 넘실대다가도 잔잔해지고, 바람이 멎을 줄 알았는데 눈보라가 몰아쳤다.

비엔나 필하모닉, 카네기홀

멋진 연주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려보니-이번에는 단 한순간도 졸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밝힌다- 브라보, 브라비를 외치는 관객들의 환호. 인사를 하고 지휘자가 들어갔다 다시 인사하러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관객들의 박수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커진다. 나는 이 순간을 늘 밀당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 밀당의 승자는 늘 관객이다. 짜릿한 승리의 전리품인 앙코르곡으로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중 왈츠.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연주가 끝났고 그렇게 공연도 다 끝났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관객들은 모두 다 이 마지막 곡을 흥얼거린다. 나도 예외 없다. 앞에 가던 커플은 그 곡을 큰 소리로 부르며 손을 맞잡고 춤을 춘다. 사랑스러운 광경이다. 내 옆에 누구라도 있었으면 나도 춤을 추었을 거다. 없어서 다행인가?


뉴욕에 왔는데 뉴욕필 공연을 안 보고 갈 수는 없지. 마침 피아니스트 유자 왕이 함께 한다니 더 기대가 된다. 오늘 그녀는 어떤 드레스를 입고 나올라나. 그녀의 등장은 역시 관객들을 술렁이게 만든다. 몸에 딱 붙은 아주 짧은 황금색 드레스가 반짝반짝 빛난다. 등도 참 시원하게도 파였다. 보수적인 클래식 공연계에서 아마 그녀만큼 ‘화끈하게’ 옷을 입는 연주자도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어떤 연주를 보여줄까? 브람스를 거침없이 들었다 놨다, 기교뿐 아니라 표현력도 뛰어나다. 거기다가 20센티미터도 넘어 보이는 하이힐을 신고 페달을 밟는 모습은 거침없이 하이킥이 아니라 거침없이 하이힐이군.

그녀가 잘 보이시나요? 반짝반짝했어요.

나보다 많이 어리지만 언니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이 언니의 밀당은 어떨까? 하이힐을 반짝이며 다시 나타난 그녀는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를 미친 기교를 보여주며 보란 듯이 연주한다. 숨을 쉴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 그러더니 밀당 따위는 필요 없어라는 눈빛으로 바로 앉아 두 번째 앙코르곡으로 들어간다. 언니, 참 쿨하네. 젊은 연주자가의 당당함이 나에게도 전염된다. 인생 뭐 있어? 내 인생 주인공은 나야 나. 그날 밤 나는 화려하게 반짝였다.


다음 공연은 미츠코 우치다의 피아노 연주다. 이번에 그녀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삼일 동안 연주한다. 그녀 역시 뻔한 드레스 차림이 아니었다. 굳이 패션을 얘기할 필요가 있겠냐마는 전날 보고 온 유자 왕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은근 보게 된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그녀는 우리가 잘 아는 배우와 느낌이 많이 닮아 있었다. 요즘 윤식당에서 셰프로 활약하고 있는 윤여정 씨- 나이도 비슷하다- 스타일을 떠올리면 감이 올 것이다. 180도에 가까운 폴더 인사로 연주를 시작한 그녀의 연주는 단아했고, 노련했다. 슈베르트는 연주하기가 까다롭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공부하는 것처럼 집중해서 들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봤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의 밀당 의식은 첫인사만큼이나 공손하게 진행됐다. 조심스럽게 연주되는 바흐의 곡. 앞에 연주했던 슈베르트의 분위기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모습을 잠깐 기대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그녀의 연주가 끝나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무대에 홀로 서있는 것처럼, 인생이라는 무대에 나도 홀로 서있는 것같이 외로움이 밀려왔다. 사람은 외로운 존재야. 모두가 그렇지. 그러니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어. 노장이 주는 위로인가? 오늘 밤 나는 사람이 그립다.


오늘 내가 있는 뉴욕은 눈보라가 몰아쳤다. 덕분에 오늘 하루는 잠깐 쉬어갈 수 있었다. 또 그 덕분에 글을 쓸 수 있었네. 그나저나 뉴욕에서 섹스 앤 더 시티를 티비로 보고 있으니 뭔가 느낌 있는데? 근데 눈보라가 몰아칠 때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이 구절을 자꾸 흥얼거리며 걸었는데, 이것도 또 다른 의미로 느낌 있었던 걸로. 뉴욕의 중심에서 흥남부두를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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