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by 박아나

나 혼자 사는 것은 아니지만 나 혼자 식당가기와 나 혼자 영화보기에 익숙한 나는 새해 초부터 나 혼자 여행을 떠났다. 뉴욕처럼 먼 곳도 혼자 잘 다녀오는 사람이니 제주도 정도면 정말 부담 없이 많이 다녔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주도에 혼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중간에 제주도 사는 친구를 만날 예정이니까 사실 완벽히 혼자만의 여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단 출발 자체를 홀로 했고 돌아올 때도 홀로 왔으니 나 혼자 여행으로 분류해도 괜찮을 것 같다. 혼자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등장해서 홀로를 써봤는데, '혼자'와 '홀로'는 뭔가 느낌이 다르네. '혼자'는 그냥 동반자 없이라는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홀로'는 애써 꿋꿋하게라는 의미가 더 담겨 있는 것 같다. 아닌가. 그 반대인가. 뭐 여하튼 혼자든, 홀로든 무사히 잘 다녀왔으니 됐다.

도착해서 바로 간 섭지코지. 거기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과 바다.

삼 년 전에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를 다녀온 게 가장 최근이어서 그런지 그때 생각이 많이 났다. 누군가 챙겨야 할 여행과 나 자신만 신경 쓰면 되는 여행, 둘 다 각각의 긴장감이 있다. 보통은 후자의 경우가 마음이 더 편하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혼자 다닐 때 어깨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건 왜일까. 요새 혼자 다니다 보면 뭔가 깜박하거나 실수하는 일들이 많아서 나 자신을 온전히 믿기 어렵다. 체력도 예전만 못한 데다 귀찮은 것도 싫어져서 궁금한 곳을 더 쑤시고 돌아다니는 일이 줄어드니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여행에 대해서도 예전만큼 엄청 기대하고 들떠 있지 않는 나 자신을 보면 그것도 조금 슬프달까. 그래도 여행 가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얼굴색이 환해지고 미소가 다른 것을 보면, 여행이 주는 기쁨은 여전히 크지 뭐.

매서운 바람을 맞아가며 혼자 돌아다니며 셀카 찍기 힘들었지만, 웃음이 나온다.

나 홀로 떠난 제주도에서 친구를 만나니 혼자 있을 때는 못했던 와우 개그를 마음껏 내뱉는다. 아... 외로웠었나 새삼스럽게. 여기서 와우 개그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뻔뻔하게 던지는 나만의 개그인데, 듣고 나면 와우와우와우와우... 뒤로 가면서 소리가 맥없이 줄어드는 반응이 나오지만, 일부 마니아들에게는 중독성이 강력하다고 제주 친구가 이름 붙여 준 것이다. 브런치 글 속에, 함께 올리는 사진 속에, 와우 개그 요소나 나올 때가 있는데, 만약 그것을 눈치챘다면 이미 당신은 나의 와우 개그에 빠져든 것일지도. 만나자마자 나의 와우 개그에 시달리던 친구는 사려니 숲길로 나를 데려갔다. 겨울인데 숲길 괜찮을까 하며 찾아간 사려니 숲길은 나의 걱정이 무색하게 아름다웠고, 그 이름에 담긴 의미처럼 신성한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쭉쭉 뻗은 빽빽한 삼나무들 사이로 조금씩 들어오는 햇살에 겨울의 녹색은 더 찬란하게 빛나고, 여길 걷고 있는 나는 축복받고 있는 느낌이다.

박나래의 '죄니'가 죄가 아니듯, 나의 와우 개그도 죄가 아닙니다. 사진 : imbc

뭔가에 빨려 들 듯이 더 깊이 숲으로 들어가니 색 바래 쓰러진 꽃을 여전히 붙들고 있는 나무수국들이 보인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수국이 멋지게 깨어나는 여름에 여길 다시 찾아오면 좋겠군. 지난번 포르투갈 여행에서도, 예전에 스페인에서도 곳곳에서 수국을 만날 수 있었는데, 수국을 실제로 키워 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어디서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잘 자라는 데다 나무수국의 꽃은 진짜 오래간다. 여름과 가을 내내 탐스러웠던 꽃을 1월의 추위에도 붙들고 서있다. 물론 갈색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시든 꽃도 꽃이니까. 웬만한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더위에도 강한 특장점을 갖고 있어 어디서나 수국이 사랑받는 게 아닐까. 작년 영하 십몇 도에도, 올해 사십 도에 가까운 기온에 유일하게 잘 버틴 것은 수국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수국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바깥의 변화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나의 길을 걷는 사람, 겨울의 수국처럼 진득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안 춥니...? 수국아.

MBC에 입사한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나를 지켜보던 한 선배가 “너는 대기만성형이야.”라고 말했었다. 그 당시에는 속으로 “저는 지금 당장 잘 나가고 싶은데요!”라고 외치며, 대기만성이라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세월이 흘러 회사를 그만둘 때 대기만성이라는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뭐야, 대기만성은 커녕 회사를 나와 버렸네. 난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건가..."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섣부른 판단인 거고, MBC 아나운서라는 인생의 1막을 끝내고 새로운 2막을 시작했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대기만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봐야겠지. 마마무의 노래처럼 "나로 말할 것 같으면"이라고 외치고 다니지 않아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가 나를 인정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래, 난 이건 잘 알고 좋아해. 계속 이런 거 하면서 살면 좋겠어."라고 생각하는 게 있으면, 그게 성공한 삶이지. 성공이란 말은 사람마다 가지는 무게감이 다르겠지만, 요즘의 내가 느끼는 성공은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다. 겨울의 수국처럼 외부의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는 삶, 욕심난다.

마마무! 자신감 있고 느낌 있는 이 여자들 따라 하고 싶다. 사진 : 전자신문

제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모차르트 관련 책을 읽었다. 요즘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습하고 있기도 하지만, 모차르트와 나는 남다른 공통점이 있어 더 관심이 간다. 모차르트의 생일이 나와 같은 1월 27일이어서 그렇다. 어렸을 때 모차르트의 전기를 읽고 그가 천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모차르트의 천재적인 음악성이 나에게도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었다. 부끄럽지만 그 때문에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 여겼던 믿지 못할 과거도 있었으니, 모차르트가 알게 모르게 내게 영향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 모차르트의 삶에서 내가 그동안 간과했던 사실은 천재인 그도 엄청나게 노력을 많이 했다는 점이다.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밑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어린 나이에도 작곡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노력이 있었기에 천재 모차르트가 더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바탕 위에 자기 확신이 있었던 모차르트는 왕이나 주교가 만들라는 그런 음악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으로 우리를 감동시켰다. 마치 수국이 외부의 자극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리 곁에 오래 남아 있는 것처럼 모차르트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나와 생년월일이 똑같아 더 호감가는 안정환 씨의 리즈 시절. 사진 :탑스타뉴스

여행의 좋은 점은 수국과 모차르트의 연결고리를 엮어낼 수 있는 생각지도 못한 영감이 떠오른다는 것과 또 하나, 허심탄회하게 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행지가 아닌 평소에도 내 속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여행지가 주는 분위기에 취해 좀 더 깊이 들어갔다고 해야 될까. 여행지의 밤에 나눈 대화가 아직도 생생하다. 언제쯤이면 내 일에 확신을 갖고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게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걸어가고 있는 화가 친구는 앞으로 십 년은 더 내다 보고 이 길을 걸으라고 한다. 그 끝이 십 년 뒤인지, 아니면 더 뒤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를 믿어 보자. 내겐 마음에 위안을 주는 수국도, 영감을 주는 모차르트도 있으니 조금은 든든하잖아. 와우 개그로 웃음을 줄 수 있는 여유도 있고.

겨울의 사려니 숲길에서 위안을 받고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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