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당의 감동, 감동의 밀당.
썸을 타도, 진짜 연애를 해도, 연애를 넘어서 결혼 생활을 해도 남녀 간에 밀당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면 결혼해서도 뭘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 싶지만, 밀당의 개념을 조금 확장해서 적용해 본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퍼 주거나 아니면 그저 끝없이 받기만을 바란다면, 힘의 균형이 깨지고, 그 기울어진 관계 속에서 그 어느 쪽도 만족하기 어렵다. 요즘 화제의 드라마 sky 캐슬에서도 그런 부부의 모습들이 등장한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강준상 교수와 딸 예서의 서울 의대 합격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엄마 한서진 부부도 그렇고, 쓸데없는 권위 의식으로 가득 찬 차민혁 교수와 그런 그를 참아왔던 쌍둥이 엄마 노승혜 부부를 보면, 역시 기울어져 있다. 한쪽은 늘 받기만, 한쪽은 늘 주기만 하는데, 받는 쪽은 당연하고, 주는 쪽은 진심이 아니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서 엄마도, 쌍둥이 엄마도, 그렇다고 늘 받는 남편들도, 좀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가족 관계에 부부의 자리는 없다. 그리고 아이들 중심으로 굴러가는 이 두 가정의 아이들도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늘 양보해야 되니까, 내가 늘 하자는 대로 하니까, 어느 상황에서나 예측 가능한 모습에 서로 기대할 것이 없어지고 때론 질리기도 한다. 그렇게 사는 게 편하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우리 마음속에 작은 변화를 원하는 울림이 있다면 어떨까. 싸울 때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잘하지 않았던 내가 뜻밖에 사과를 건네었을 때, 생일 선물을 딱히 바라지 않던 남편이 이번 생일에는 너한테 이런 선물 받고 싶다고 지정해서 말했을 때, 너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관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심하게 혹은 약간의 의도를 품은 행동일지라도, 마치 매번 같은 길로 오던 퇴근길을 다른 길로 올 때 느껴지는 새로움처럼 밀당은 우리에게 일상의 생기를 준다. 이건 내가 더 좋은 위치를 선점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게 아니라, 관계에 활력을 보태는 일임을 결혼기념일을 열세 번쯤 지나고 보니 깨닫는다. 여전히 잘 되지는 않지만. 특히 아이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 부부에게 밀당은 서로의 존재를 각성하기 위한 노력이다. 육아라는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으려면 밀당이고 뭐고, 남편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친구들도 많지만, 세월이 지나 아이들이 크고 나면 내 곁에 남는 건 남편뿐일 수도 있다. 그때 갑자기 무심한 듯 다가가 기대하지 못한 행동을 보인다면, 서로 “왜 그러세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뭐든지 단계가 있다. 갑작스러운 밀당은 부담이고 충격이다.
이 밀당이 감동으로 다가오려면 우리가 드라마에서 열광하는 츤데레 주인공을 떠올리면 된다. 츤데레는 겉으로는 무관심해 보이나 알게 모르게 신경 쓰고 챙겨주는 정이 깊은 캐릭터로 한마디로 말해, 밀당에 능하다. 상대방은 이 츤데레의 밀당에 울고 웃는다. 츤데레는 강약 조절에 능해 쓸데없는 일에는 기운 빼지 않고, 딱 필요한 순간에 빛을 발한다. 이런 효율과 능률의 캐릭터인 츤데레는 사실 준비된 인재다. 상대방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으로 들여다보기 때문에 상대방의 흔들리는 눈빛도 바로 감지하고 다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츤데레의 밀당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계획하고 준비된 행동이란 말이다.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었다. p 피아노, 작은 소리로 연주하라는 표시가 있는 마디에서 소리를 줄이다가 그다음 두 마디는 별다른 마크가 없어 비슷한 크기로 진행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마디는 f 포르테여서 포르테 표시를 보는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건반을 두들겼다. “잠깐만요!” 정지하라는 선생님. 뭐가 잘못됐나. “그렇게 갑자기 준비도 없이 커지면 안 돼요. 이 부분은 전 마디와 연결하는 느낌을 줘야해요. 혼자 툭 튀어나오는 부분이 아니에요. ” 그 전에는 피아노였고 이젠 포르테니까 확실하게 강조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선생님의 말. “ 강조하는 건 좋은데 그전부터 조금씩 분위기를 풍기면서 포르테 부분에서 분출하는 거예요. 일종의 밀당이죠. 조금씩 조금씩 그런 느낌이 쌓이면서 강하게 훅 던지고 다시 싹 안으로 끌어들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래야 감정이 풍부해지죠. ”
피아노에서 밀당이...? 다소 당황하기는 했지만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다. 그래, 사람 사이도 갑자기 밀어붙이면 좋았던 감정도 사그라들 수 있지. 조금씩 조금씩 끈을 잡아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밀당을 해야 감정도 더 풍부하게 커지는 법이다. 내 감정에 빠져 격렬하게 빨리만 치는 연주에서 어떻게 큰 감동이 생기겠나. 감정의 절정을 향해 그전부터 치밀하게 한음 한음 쌓아 올려 터뜨린 감동은 깊고 단단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조금씩 밀어붙이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다시 당기기도 하면서, 다음에 올 변화를 미리미리 준비하면서 쫄깃쫄깃한 밀당으로 연주하는 피아노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밀당의 고수가 아니라면 어설픈 밀당은 시도조차 하지 말라는 누군가의 조언이 떠오른다. 단순히 감정의 밀고 당기기로만 밀당을 본다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밀당의 의미를 상대방을 향해 준비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은 관계를 원하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노력이 밀당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서로에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몇십 년을 함께 사는 부부도 그 안에서는 다양한 크고 작은 밀당의 흐름이 존재한다. 단지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밀당 인지도 모르고 지나갈 뿐. 조심스럽게 밀고 당기며 감정을 조절해가며 한 음, 한 음, 그리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어져 하나의 곡이 아름답게 완성되듯이, 우리 삶도 그렇게 밀당으로 더 풍부해지겠지. 그런 밀당이라면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