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 필요해.
드라마 스카이 캐슬이 연일 화제인 덕분에 아이를 둔 엄마들이 코디 두고 공부했느냐, 과외를 저렇게 살벌하게 했느냐는 등 질문이 많다. 지금으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일이기에 뭘 어떻게 했는지 세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겐 김주영 선생도 없었고, 각종 학원으로 도배된 시간표도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공부만 죽어라 팠던 학생은 아니었다. 늘 틈을 노렸다. 놀 틈 말이다. 중학교 때는 공부하는 척하면서 책 사이에 만화책을 숨겨 읽고, 르네상스와 하이센스 같은 만화 잡지들을 침대 밑에 잔뜩 쌓아 두었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방을 들락거렸던 나는 순진한 나의 친구들에게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만화를, 그리고 비디오 대여점을 드나들며 영화의 세계에도 빠졌다. 노래방도 자주 다녔는데, 이 역시 믿거나 말거나 나는 흥이 많은 아이였다. 잠도 많았고. 운 좋게도 성적은 좋았고, 스카이 캐슬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피라미드의 정점을 향해 가기 위한 단계인 외국어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직도 외고 첫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보충학습 교재로 "성문 종합 영어"를 한다는 말에, 역시 외고는 앞서가는구나 생각했다. 3학년 언니들이나 보는 책인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근데 우리 반 아이들의 대부분이 이미 그 책을 끝냈다는 걸 알고 나니 참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문 기초 영문법"을 겨우 뗐는데, 이럴 수가. 당황은 현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입학하자마자 영어 시험을 봤는데, 제대로 푼 문제가 거의 없었다. 영어 시험지는 모르는 단어로 가득했고, 지문을 해석하는 일 역시 쉽지 않았다. 그냥 찍었다. 어쩔 수 없지. 첫 단추가 잘못 꿰어져서일까. 외고 시절 내내 영어는 나를 힘들게 했는데, 지금도 영어를 잘 못하는 거 보면 뭔가 영어랑 나는 코드가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스카이 캐슬의 예서라면 영어 실력이 이러한 지경이면 집에서 난리가 났을 테지만, 그때는 딱히 방법이 없었다. 그저 영어 단어만 줄곧 외웠을 뿐. 단어를 많이 알면 뭐라도 끼워 맞춰서 답을 유추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이 방법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나 보다. 영어 때문에 발목 잡혀서 대학을 못 가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여하튼 내가 어렸을 때는 나 혼자 해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의 아이들은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긴 하지만 우리 때보다 공부할 게 훨씬 더 많고 경쟁도 엄청 심하다. 이런 빡빡한 현실 속에 관리하는 부모도, 관리받는 아이도 모두 힘들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들 한다. “저렇게까지 해야 돼?”라며 아이 성적 때문에 안달복달하는 이야기들에 냉소를 보냈던 친구들도 내 아이가 유치원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달라진다. 나도 그랬을까. 친구들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을 거라고 웃는다.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영어 노래를 외워 부르고, 유튜브에서도 영어 프로그램에만 찾아보는 아이의 엄마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영어라면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지는지라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떠오른 것은 피아노였다. “피아노를 시켜봐.” “응? 피아노? 이제 겨우 다섯 살인데?” “영어도 혼자 하는데 충분히 할 수 있지.” “근데 피아노랑 공부랑 무슨 상관인데?” “공부를 잘했던 이유가 피아노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피아노를 치는 것 자체가 뇌를 자극하는 일이잖아.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치면서 자극받은 뇌 덕분에 문제 해결 능력도 좋아지고 기억력도 향상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피아니스트들 중에 머리 좋은 사람들 많았어. 아직 아이가 어리니까 앉아서 공부하라고 할 건 아니고, 피아노를 배우면서 뇌를 자극해서 머리를 발달시키는 거지.”
집에 돌아와 정말 내 말이 맞나 싶어 후루야 신이치의 “피아니스트의 뇌”라는 책을 찾아 읽어 봤다. 책에 따르면, 실제로 손가락을 복잡하게 많이 움직일수록, 재빨리 움직일수록, 뇌의 신경세포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인다. 게다가 피아노는 양손의 움직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정보를 처리하느라 뇌가 바빠져 뇌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 미국인 음악가에게 중국어를 들려주는 실험을 했더니 중국어를 공부한 적이 없는데도 중국어의 음높이를 알아듣는 능력이 음악가 쪽이 좋다는 연구 결과도 소개했다. 언어 훈련을 하지 않아도 언어를 알아듣는 능력이 향상된다는 이야기인데, 피아노를 치면 음악을 듣는 귀가 좋아지니, 그 결과 언어 능력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거다. 영어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 엄마에게 이 사실을 진작 알려줬으면 좋았으려나.
반쯤은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 엄마에게 피아노가 머리 발달에 좋다는 건 그냥 던지는 미끼였다. 영어든 뭐든 공부를 잘하도록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 틈이 있는 아이로 컸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아이는 틈이 있는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 틈을 채우는 건 피아노든 뭐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틈날 때마다 봤던 만화책과 영화, 그리고 즐겨 찾던 노래방이 없었다면 정말 도망치고 싶을 때 도망갈 곳이 없어 정말 힘들지 않을까. 이런 틈은 어른이 돼서도 당연히 필요하다. 나를 옭아매는 일에서,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날 틈, 숨 쉴 틈 말이다.
무엇보다도 어릴 때 틈틈이 쳤던 피아노야말로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만나지 못했다면, 시간이 흘러 줄리어드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피아노만 바라보고 살아오지 않았는데, 이렇게 피아노에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됐다. 한 때는 공부 좀 하는 아이였는데, 이제는 피아노 좀 치는 어른이고 싶으니 말이다. 틈은 이래서 필요하다. 틈으로 하루가 꽉 차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