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엄지 척

by 박아나

엄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동 반사적으로 "엄지 척"하고 엄지 손가락이 위로 향한다. 다 알다시피 뭔가 자랑스럽거나 대단한 것을 인정할 때 나오는 동작인데, 어른들 이모티콘 세계에서는 하트 다음으로 많이 쓰인다. 옛날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주인공 까치가 좋아하는 여자친구 이름으로,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아이돌 그룹인 여자친구의 멤버의 이름으로, 세대에 따라 다른 엄지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기도 끝에 어렵게 가진 아이가 엄지만큼 작게 태어났다는 의미로 붙여진 안데르센 동화 속 아이도 엄지네. 뭐가 됐든 엄지는 소중하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엄지 척하면 홍진영도 빼놓을 수 없네요. 사진 : TV리포트

그런 소중한 엄지를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다시 만난다. 그렇다. 엄지 손가락 말이다. 다섯 손가락 중에 가장 굵고 짧아 가늘고 긴 다른 손가락들에 비해 보기에는 모양이 빠지지만, 구조상 타고난 힘을 가지고 있어 '대장'같은 역할을 한달까. 엄지는 대장 특유의 힘이 들어가 있다. 원래 대장은 어떤 상황에서든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야 되니까, 내가 중심이 돼서 다른 손가락들을 지켜야 되니까 엄지는 강하다.

대장 하면 또 캡틴 아메리카의 스티브 로저스. 물론 힘셉니다. 사진 : 시선

그래서일까. 이 엄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고 뗀 뒤 다른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고 있을 때도 엄지에는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인다. 약간의 커브를 유지한 채, 건반을 눌렀던 손가락 모양 그대로 힘이 들어가 있다. 방금 친 음을 절대 잊지 않을 기세로 군기가 빡 들어가 있다. 대장이 대장 역할을 잘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문제가 되냐 묻는다면, 그 군기가 문제다. 엄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나머지 손가락들로 힘이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부족한 힘으로 누른 건반의 소리 역시 부족하다. 말하자면 힘을 골고루 나눠 써야 하는데, 가뜩이나 힘센 대장이 힘을 내놓지 않으니 원래 나약한 나머지 부하들이 내는 소리는 더 작고, 더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럼, 힘을 좀 빼면 되지 싶지만 피아노 전공자들도 대학 시절 내내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엄지 손가락에 힘을 빼라"는 지적을 받는다고 하니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이다.

엄지 손가락을 들었는데도 엄지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게 보이시나요?

내 몸이지만 내 몸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은 부족한 운동 신경을 통해 많이 경험해왔다. 부끄럽지만 체육 시간에 뜀틀을 넘는 것도, 요가할 때 몸을 쭉 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원하는 순간에 근육에 힘을 주거나 힘을 빼는 일이 피아노 연주에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니 뭔가 큰 장벽에 부딪힌 것 같다.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구간에서 손가락들이 자꾸 꼬이고, 일정한 크기로 들려야 할 음들이 각기 다른 소리로 지저분하게 연주되는 구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엄지 손가락에 힘 빼기. 내 손가락이 내 것이 아닌 건지 마음대로 힘이 빠지질 않는다. 게다가 손등을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손등에 힘을 넣다 보니 손등과 연결된 엄지에도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가 손등 따로, 엄지 따로 힘을 주고 빼는 게 어렵다. 사실이다.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그렇다고 손등에 힘을 빼버리면 손등이 고정이 안 돼서 다섯 손가락 모두 통제가 안되니까요. 그럼 음들이 더 들쑥날쑥해지는데 그건 안되죠. 엄지 손가락을 누르고 나서 힘을 빼야 나머지 손가락들로 힘이 전달되고, 그래야 음색이 고르게 나니까 어쩔 수 없죠. " 피아노 선생님 말은 더 사실이다.

예전 아육대에서 여자친구의 엄지. 체육돌이구나... 부럽다. 사진 : 헤럴드경제

음을 누르고 나서도 긴장된 채로 힘을 주고 있던 엄지 손가락에 살포시 힘을 빼려고 노력한다. 이어지는 다른 음들의 소리가 좀 명료해지는 느낌이다. 완벽하게 되지는 않지만 조금씩 고쳐지고 있다고 믿으면서 연습을 계속한다. 엄지에 신경을 집중했더니 그동안 나도 모르게 엄지에 많이 의존해왔구나 싶다. 뭐랄까. 엄지 손가락은 우리가 타고난 재능 같은 거다.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되는 것들 말이다. 물론 없어서는 안 될 고마운 것들이지만, 그런 데에만 의지하기에 피아노 연주도, 우리의 삶도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엄지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엄지에만 힘을 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말이다. 엄지로부터 힘을 받지 못한 나머지 손가락들이 삐걱대는 것처럼 미래도 흔들릴 수 있다.

영화 라디오스타 속 록스타 최곤. 과거에 매몰됐었죠. 사진 : 씨네 21

엄지는 시간으로 따지면 과거다. 나 예전에 이랬는데, 나 뭐했던 사람인데. 과거가 화려할수록, 현재가 고단할수록 과거에 매몰되기 쉽다. 물론 엄지가 있기에 나머지 손가락들도 힘을 받는 건 사실이다. 우리를 이룬 과거가 소중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 때문에 놓치는 미래가 있다면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하는 소리다. 아나운서였을 때 이랬단 말이지, 회사 생활은 이래야 말이지... 회사를 그만둔 것도, 다른 일을 시작한 것도 한참인데, 자꾸 뒤를 돌아본다. 그만큼 살아온 세월이 길어져서 기억할 추억도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기대도 줄었기 때문이 아닐까. 엄지 손가락에 힘을 빼서 다른 손가락으로 힘을 보내듯이, 나의 옛날보다는 나의 현재, 나의 미래로 중심 이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로만 위안받기에는 나머지 손가락들은 아직 세상 밖에도 나오지 못했으니까. 엄지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진짜 엄지 척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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