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배우 류준열이 나오는 ‘트래블러’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그는 쿠바를 배낭여행하고 있었고, 우리가 쿠바 하면 으레 떠오르는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던 그 바, 엘 플로리디타(EL Floridita)에서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그 술, 다이끼리를 마셨다. 지금은 헤밍웨이는 떠나고 헤밍웨이 동상이 대신하고 있지만, 설탕기 쫙 뺀, 독한 다이끼리를 열두 잔씩이나 들이키며 지인들과 열띤 대화를 나누었을 예전의 헤밍웨이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서점에 가니 “헤밍웨이의 요리책”이라는 책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요리책보다는 요리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 요리책은 특별히 '헤밍웨이'라는 단서가 앞에 붙어 있으니 괜찮을 것 같다. 책 속의 헤밍웨이는 먹고 마시는 일을 즐겼고, 어쩌면 식도락가로서 세계의 모든 맛을 다 경험하고 싶었던 건지 여행을 좋아했고,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거처를 옮겨가며 살았다. 레시피까지 기록한 요리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파리 플뢰르가 27번지로 거투르드 스타인을 처음 만나러 갔을 때 잔뜩 긴장했던, 스물두 살의 젊은 헤밍웨이의 모습이 나를 사로잡는다. 거트루드 스타인이라면,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에서 피카소의 그림이 마음에 안 든다며 독한 말도 아끼지 않았던, 그 당시 문화, 예술계의 대모 아닌가. 영화 속에서 헤밍웨이는 스타인과 아주 가깝게 우정을 나누는 관계로 나오는데, 실제로 헤밍웨이는 그녀에게 글쓰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일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결국 다시 꺼내 든다. 주인공 길 펜더가 현실에서 여자 친구와 결혼 준비 문제로 갈등하는 내용은 건너뛰고, 종소리가 들리면 마법처럼 시간 이동을 하는 장면들만 집중적으로 말이다. 1920년대로 넘어간 주인공 길은 피츠제럴드 부부를 만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어니스트 헤밍웨이까지 소개받는다. 헤밍웨이와의 만남에 감격해 어쩔 줄 모르던 길에게 헤밍웨이는 복싱을 할 줄 아냐고 대뜸 물으며 보이지 않는 한 방을 날린다. 실제로 그는 권투나 투우 같은 격렬한 운동들을 말년까지 즐기고 좋아했다. 영화 속에서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아드리아나에게도 사자 사냥을 해봤냐고 묻더니만 아프리카로 그녀와 함께 사냥 여행을 떠난다. 실제로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낚시와 사냥을 많이 다녔고, 이런 취미는 말년까지 계속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을 수 있게 만드는 사랑이 아니라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길에게 조언하던 그의 눈빛도 잊을 수 없는데, 그는 현실에서도 누구보다도 사랑과 이별을 많이 했던 사람이다.
헤밍웨이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다. 풍부할 뿐만 아니라 깊이도 남다르다. 한 번 빠지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 때문인지, 무엇이든 그 끝을 봐야만 직성이 풀린다고나 할까. 이런 그의 성향은 소설 속에서 여러 가지 상황을 묘사할 때 독보적으로 빛난다. 그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큰 고기와의 사투는 어느 한 군데도 빠짐없이 실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생생한 묘사로 가득 차 있다. “노인은 고기의 모습을 한 번 봤기 때문에 자줏빛 가슴지느러미를 날개처럼 활짝 펴고 커다랗고 꼿꼿한 꼬리를 꼿꼿이 세운 채 어두운 물속을 자르듯 헤엄쳐 나가고 있는 모습을 눈앞에 그려 볼 수 있었다”라고 묘사했듯이, 우리도 그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짐작하듯이 평생 해 온 낚시의 경험이 소설가의 작품에 녹아드는 것은 당연하고,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런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의 소설은 실화보다 더 실화 같다. 소설에서는 이런 구체적인 묘사를 자유롭게 했지만, 헤밍웨이가 작곡가였다면 어땠을까. 음악의 묘사는 문학작품에서 만큼 세세하게 이루어지기 쉽지 않았을 터. 언어라는 직접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언어라는 무기 대신, 작곡가는 악보에 그려 넣은 음표와 악상기호, 지시어들에 변화를 주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묘사한다. 그리고 연주자들은 작곡가가 제시한 여러 가지 힌트를 바탕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표현한다.
작곡가는 무엇을 보고, 어디서 영감을 얻어 이렇게 표현을 했을까. 작곡가가 느낀 감정을, 아니 이 곡을 통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어떻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1악장은 어떻게 표현하고 싶으신가요?” 모차르트 소나타 12번 1악장을 유심히 듣던 선생님의 질문이다. “글쎄요. 어떻게라...” 잠시 주저하고 있는 나는 놀랍게도 답을 이어갔다. “시작은 엄마가 밖에서 노는 아이를 집으로 오라고 상냥하게 부르는 것 같아요. 아이가 돌아와 엄마에게 애교를 부리고 장난치다 도를 넘어, 엄마의 분노를 일으켜요. 몇 번의 화를 낸 엄마는 다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아이와 단란한 한 때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아이와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하면서 유쾌한 오후 한 때가 마무리되는 거죠.”
모차르트의 생각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가 그리고 싶었던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영 잘못짚었을 수도 있고,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내놓을 수도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연주를 하면서 내가 상상하는 엄마와 아이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더 몰입하고, 세세한 묘사에 힘쓰는 재미가 이 곡을 더 매력 있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연주자에 따라 표현 방식이 다르고, 같은 연주자도 세월이 지나면 다른 연주를 들려준다. 표현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도 각자의 몫이다. 지난주 나를 홀려놓고 간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연주도 모두에게 다른 선율로 들렸던 것처럼.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말처럼, 무엇을 묘사하든 그 이상이다.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들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으니 거기서 묘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그저 피아노나 잘 치길 바랐던 나로서는 예상치 못한 소득이다. 여기서 얻은 마음의 여유로 나의 시간들은 그 어느 때보다 조급하지 않다. 넉넉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또 그런 감정들을 글로 묘사할 수 있는 나날들이 있어 감사하다. 더불어 이런 생각으로 이끌어 준 헤밍웨이에게도 감사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