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봄을 연주하는 방법

by 박아나

꽃샘추위가 찾아온 걸 보니 봄은 봄이다. 봄이 너무 쉽게 찾아온다면 봄답지 않을 터.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것보다는 “나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라며 존재감 팍팍 드러내는 그런 봄이 좋다. 쉽게 다가오는 것보다는 어렵게 얻었을 때 느끼는 기쁨이 더 큰 법이니까.

개나리는 이미!!! 추워도 꽃은 핍니다. 사진: 국민일보

나에게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공연이 그랬다. 짐머만이라면 쇼팽 콩쿠르에서 최연소의 나이인 19살에 우승하고, 쇼팽의 조국인 폴란드 출신의, 그래서 더욱 쇼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폴란드의 국민 피아니스트, 아니,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다. 그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무척 강해서 음반을 내는 일이 많지 않고, 연주회 횟수도 한 해에 50회로 제한하며 자기 관리에도 엄격하다. 그런 그가 내한을 하는, 그것도 16년 만에 오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법. 그러나 이런 귀한 기회를 나만 노리고 있었을 리는 없었고, 내가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매진이었다. 포기하고 있던 어느 날, 나처럼 짐머만 공연 표를 구하지 못했다는 라디오 청취자의 사연을 소개하며 진행자가 던진 말. “공연이 가까워지면 취소되어 돌아오는 표들이 있어요.” 혹시 모르니 참고하라는 이 말에 바로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니 이게 웬일! ‘무려' 두 자리나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거짓말처럼 남아있던 그 자리를 그야말로 '득템'했다.

나머지 한 자리를 그 청취자 분이 가져가셨을까... 사진 :인터파크 티켓.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우리나라 피아니스트 조성진과의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2015년 17회 쇼팽 콩쿠르에서 조성진의 결선 연주가 끝나자마자 함께 연주 경험이 있던 동료 음악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에게 이 친구가 누구냐며, 금메달이라고 문자를 보낸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그의 말대로 조성진은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역시 대가의 귀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인가 보다.

쇼팽 콩쿠르 우승이 발표되던 그 순간, 얼마나 기뻤을까요. 사진 : 연합뉴스

대가는 귀만 달랐을 리는 없다. 그가 어떤 곡은 여러 가지 손가락 번호를 준비하고 있다가 연주회의 상황에 따라 손가락 번호를 선택해 사용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듣고 나는 무척 놀랐다. 사실 손가락 번호, 그러니까 핑거링은 곡을 익히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챙겨야 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미솔미도' 라는 음을 오른손으로 친다면, 다른 변수가 없는 가정하에, '3531(세 번째, 다섯 번째, 세 번째, 첫 번째 손가락)'의 순으로 누르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전의 음이나 그다음 음이 뭐냐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는데, 이런 모든 상황들을 감안한 뒤, 주어진 음들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손가락 번호를 알아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할 일은 손가락 번호에 맞춰 연습을 하고 거의 몸에 배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손가락 근육이 자동으로 다음에 칠 음을 미리 준비하는 놀라운 기억력을 얻을 수 있다. 그 결과 무대 위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들이 실수 없이 곡을 끝내게 된다.


핑거링 고민의 현장... 악보에 미리 쓰여 있기도 하고, 생략되어 있기도 해요.

지금은 고인이 된 스페인 피아니스트, 알리시아 데 라로차는 엘리제 마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핑거링에 대한 결정은 실제 연주회장에서는 별로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때가 되어서 이를 바꾸는 것은 다소 늦은 것이 된다. 사전에 미리 실제적인 핑거링을 터득하는 것이 유리하며, 특히 핑거링은 안전한 연주를 위한 토대가 된다고 생각한다.”라며 핑거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의 피아노 선생님도 내가 꼬이는 부분에서는 먼저 핑거링부터 점검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 손가락 번호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손가락 번호를 제대로 익혀서 손가락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무대에서 실수를 줄일 수 있어요." 라로차와 선생님의 말처럼, 연습을 하면 할수록 손가락 번호, 이 핑거링이 무척 중요함을 깨닫는다.

엘리제 마흐가 쓴 "Great contemporary pianists speak for themselves "에서 인용한 알리시아 데 라로차의 핑거링 이야기와 사진.

다시 짐머만으로 돌아가서, 손가락 번호를 상황에 맞춰 선택한다는 일이 왜 그렇게 놀라운지 이제는 이해가 될 것이다. 이미 몸에 밴 이 손가락 번호를 연주회 도중에 즉석에서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아나운서였던 내 일과 비교하자면, 잘 준비해서 완벽하게 외운 원고의 순서를 내가 현장에서 갑자기 의도적으로 바꾸는 것과 같달까. 완벽주의 성향의 그라면 오히려 실수를 피하기 위해 손가락 순서를 절대 바꾸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어쩌면 실수할 수 있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손가락 순서를 바꿔야 성이 차는, 진짜 완벽한 연주를 꿈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핑거링이 연주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손가락 번호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연주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음을 반증하는 셈이기도 하다.

짐머만의 쇼팽 발라드 1번을 들으면서 글을 쓰니 참 좋다. 곡도, 연주도 미치도록 훌륭하다. 사진 : 크리스티안 짐머만 앨범, 애플뮤직.

우리 삶은 나에게 맞는 핑거링을 찾아가는 길이 아닐까. 내가 잘하는 일은 무엇인지, 내가 일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지와 같은 일과 관련된 것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내게 잘 맞는 방식을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알아가는 과정 말이다. 그래야 어떤 위기나 유혹의 순간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생기니까. 피아노 연주에도 우리 삶에도 핑거링은 뭐가 됐든 기본이다.


내게 딱 맞는 핑거링을 장착했다고 해도 때론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현빈이 자주 던지던 말, “그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라고 되묻기를 게을리하지는 말자. 무대 위에서 돌발적으로 다른 손가락 번호로 연주하는 짐머만처럼, 어쩌면 최선보다 더한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새로운 눈으로 보면, 생각지 못한 다른 가능성도 열리는 게 세상사, 우리 삶이니까. 봄도 그렇다. 언제 올 지 모르는 꽃샘추위로 우리의 생활에 변주를 더하며 그 속에서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줄 테니. 늘 걷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 돌아가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봄이 좋다. 그리고 그런 봄이라면 무엇이든지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시크릿 가든의 현빈이 입은 반짝이 운동복. 그게 최선입니까? 뭐... 잘 어울리긴 하네요. 확실해요?^^ 사진 : 이데일리

p.s 오늘 밤에 있을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공연, 잘 보고, 아니 잘 듣고 오겠습니다. 후기는 다음 기회에 올릴 수 있길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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