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면
아... 모차르트 11번과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다. 사실 12번을 배우면서 11번도 계속 점검을 받고 있다. 이제는 됐겠지, 이제는 됐겠지 하면서 아직도, 여전히 씨름 중이다. 이제 석 달을 훌쩍 넘어섰는데, 더 이상 질리지도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11번은 애증을 넘어서 하농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무런 저항 없이 하농으로 손을 풀고 난 뒤 자연스럽게 11번으로 넘어가고, 그러고 나서 12번으로 마무리한다.
1악장부터 3악장까지 다 듣고 난 뒤 선생님은 이제 어떻게 연주를 풀어나가야 할지 잘 아는 것 같다고 칭찬을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주문. “지금 빠른 속도로 연주하는데요, 중간중간 부정확하게 들리는 음이 있어요. 다음 레슨 전까지 한 음 한 음 버리는 음 없이 연주할 수 있게 지금보다 속도를 많이 늦춰서 해보세요, 천천히요.” 갑자기 천천히 왜? 오히려 지금보다 더 속도가 나야 되는 거 아닌가. 퇴행이다. “그렇게 일주일 연습하고 이 곡은 일단 끝내겠습니다.” 뭔가 허무하면서도 찝찝하다.
선생님은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곡을 도로 천천히 연습해오라고 한다. 순간 내가 많이 부족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생님의 큰 뜻을 믿기로 한다. 막상 연습을 시작하니 달리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속도를 최대한 늦추었다가도 연주에 집중하다 보면 도로 빨라져 버렸다. 사실 나는 빠르게 치는 걸 즐기는 편이다. 그런 내가 석 달 넘게 붙들고 있던 곡을 다시 천천히 치려니 영 답답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선생님의 지시를 철저히 따르겠다는 각오로 브레이크를 계속 밟았다. 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아니고, 이제 막 면허를 딴 초보 운전자라고!
천천히, 더 천천히, 한 음도 놓치지 않겠다는 자세로 연습에 집중한다. 이렇게 천천히 치는데 틀릴 음이 있겠나 싶어 없던 자신감까지 생긴다. 그렇게 무리 없이 순항하는가 싶더니 어라! 제대로 누르지 않는 음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똑같은 힘으로 연주해야 되는 16분음표들 중에 네 번째 손가락으로 누르는 음들은 소리가 작거나 엇박자로 자주 뒤뚱거렸다. 4분음표인데, 8분음표처럼 짧게 누르고 있었고, 쉼표에서 손가락을 떼지 않고 길게 누르기도 했다. 속도를 늦추니 더 잘 들린다. 복잡한 꾸밈음도 선명하게 들리는 걸 보니 그 전에는 꽤 무성의하게 꾸밈음을 처리했었나 보다. 게다가 오른손에 비해 잘 고정되지 않는 왼손을 돌아볼 여유까지. 꽤 소득이 많다.
선생님의 큰 뜻을 이제 좀 알 것 같다. 기존에 내가 치던 속도로는 내 연주에 취해서, 정말 잘해서 취한다는 뜻은 아니고, 속도감에 밀려, 문제점들이 그냥 묻혀버린 채 후루룩 끝나버리고 만다. 뭔가 부족한 점은 있지만, 정확히 어느 지점이 문제인지 정신없이 치고 나면 잊어버린다. 그러면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어느새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거다. 완주는 했지만, 아주 개운치만은 않다. 열심히 재빨리 뛰었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그렇다. 무작정 뛰느라 앞만 보고 달렸다. 이렇게 천천히 속도를 줄이니 손가락에도, 듣는 귀에도, 머리에도 여유가 생긴다. 이 속도라면 이제 다시 보이고 들리니, 더 노력하면 고칠 수도 있겠다. 이 곡을 처음 만나 한 음 한 음 틀리지 않게 천천히 눌렀던 그때로 시계를 돌리자. 초심으로 돌아가 챙길 것은 챙기고 버릴 것은 버리자.
예전에 아나운서 시절에 뉴스 원고를 읽을 때가 떠오른다. 아나운서 업무 중에 라디오 뉴스는 기본인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신경 쓰면 잘 되다가도, 잘 하다가도 어느 순간 무너진다. 대부분 잘 읽게 되면 속도가 붙는데,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모든 뉴스를 빠른 속도로 처리하던 어느 날 나의 뉴스를 다시 듣게 되었다. 속도가 빠르니 발음이 부정확하게 쓰윽 넘어가질 않나, 끊고 쉬고 해야 할 부분들도 명확하지 않다. 오독 없이 빠르게 읽는 게 잘 읽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방송 직전에 뉴스 원고를 미리 읽는 예독 때도 기계적으로 후루룩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이렇게 예독 때 대충 넘겼던 것들이 결국 실제 방송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때 내가 취한 조치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신입의 자세로 돌아가 예독 때부터 천천히, 꼼꼼하게 원고를 읽어 내려간다. 속도를 줄이니 잘 안 되는 발음도 챙기게 되고, 끊어 읽어야 할 부분들도 더 신경 쓰게 된다. 놓치는 부분을 최대한 줄이며 그렇게 다시 느린 속도로 연습하다 보니 효과가 있었다. 속도를 조금 늦춰 듣기에 더 편안하게 뉴스를 하니 뉴스에 더 자신감이 붙고, 뉴스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뉴스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매일 먹는 밥도 허겁지겁 먹으면 뭘 먹었는지도 모르고 속만 아프지 않은가. 어렸을 때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그래야 소화도 잘 되는 게 당연한 건데, 매번 체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사실 선생님의 주문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1번을 일단 끝낸다는 제안 뒤에 덧붙인 이야기가 있다. 일단이라는 찜찜한 부사어는 잠시 접었다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돌아오자는 의미로 붙인 말이었다. 아직 속도를 줄여서 연습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주문대로 잠시 떠났다 돌아오면 어떤 효과가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이런 느낌일까. 하루 종일 붙들어도 풀리지 않던 수학 문제였는데, 한 달 뒤 즘 시간이 흘러 다시 풀면 의외로 쉽게 해결되는 아주 바람직한 경험 말이다.
우리가 그 일에 매몰되어 있을 때는 모르고 그냥 넘어가는 것들이 많다. 모르고 넘어간다기보다는 모르는 척한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는 결과만 바라보고 뛰어가야 되니까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렇게 뛰어가느라 무시하고 건너뛰었던 장애물들이 어느 순간 내 앞을 가로막을 정도로 높아져 거대한 장벽처럼 변해있을지. 그렇게 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자. 다시 속도를 늦추고 앞에 막힌 장애물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된다. 그러느라 시간이 좀 지체되겠지만, 장애물들이 정리되면 더 멀리, 원한다면 더 빠르게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나의 피아노 실력도 앞으로 쭉 나아가기를 기대해봐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