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진격의 피아노

by 박아나

요즘 예전보다 유튜브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 스마트폰으로 보니 화면이 작아 눈도 침침하고 아프다. 스마트폰 배터리도 빨리 닳는다. 내 시간도 함께 닳아 없어질 것 같다.


뭘 그렇게 보는가. 아니, 뭘 그렇게 빙빙 둘러말하는가. 그렇다. 나는 요즘 아이돌에 빠져 있다. BTS, 방탄소년단. 늦게 입덕 했기 때문에 그동안 쌓인 동영상이 너무 많아서 다 쫒아가기에는 역부족이지만, 잘 정리해서 친절하게 올려주는 아미들 덕분에 어렵지는 않다. 그들의 무대와 자기들끼리 찍은 영상들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더 어려웠을 뿐. 물론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덕밍아웃도 마찬가지다. 이 나이에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을 공개하면 나잇값 하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를 좋아하는 것은 멋진 일이고,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은 숨겨야 되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내 취향의 폭이 넓어서 그게 자랑스럽다. 나는 이런저런 것들을 다양하게 좋아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BTS In Wembley 사진 : 경향신문

소년들의 무대는 에너지로 넘친다. 각이 딱딱 떨어지는 칼군무와 그에 못지않게 강렬한 랩과 노래를 보고 듣고 있노라면 없던 힘도 생기는 것 같다. 무엇보다도 소년들은 젊기에, 아니 내 기준으로는 어리다고 해야 되나, 그 젊음은 나를 더 생기 있게 만들어준다. 아무래도 춤보다는 노래가 더 낫겠지 싶어 노래를 불러본다. 아이돌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못 알아듣는 가사들도 있어서 가사를 보면서 따라 해야 한다. 주로 10대를 대상으로 만든 가사 들일 텐데, 왜 이렇게 와 닿는 내용이 많은 건지. 내 피 땀 눈물은 무엇을 위해 흘려왔는지, 흘린 적이 있긴 한 건지.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으니 대답해야 할 것 같고, 네가 꿈꿔 온 네 모습이 뭐야, 지금 네 거울 속엔 누가 보여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찔린다.

'피 땀 눈물'의 결과, 지금의 그들이 되었다. 사진 : YTN

나보다 훨씬 어린 친구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나이가 돼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를 수 있고, 아직 꿈이라는 게 있는 건지 여전히 의심과 고뇌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과거에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한 후회까지 더해져 이제라도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매일 깨닫는 것은 피아노 연습을 하면서다. 어렸을 때도 진득하게 연습하지 못해서 많이 혼나곤 했는데, 지금도 그렇다. 심지어 혼내는 사람도 없어 나 자신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연습을 해야 하는데 유혹이 많다. 그래도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피까지는 아니어도 땀 정도는 쏟아야 하지 않을까. 요즘 많이 드는 생각은 정말 열심히 달려야 하는 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순간을 놓치면 같은 기회는 다시 잘 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는 아예 오지 않게 돼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예전의 기회조차도 결국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지 우연히 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함께.


나는 어쩌면 또 다른 기회를 바라는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을지도 모르겠다. 슈베르트 즉흥곡 op.90, 2번의 첫 제시부를 레가토로, 물 흐르는 느낌으로 오른손에 집중해 연습해 본다. 흐르는 느낌이라고 해서 그냥 흘려버리면 안 된다. 뭐가 됐든 이 곡을 끌고 나가는 것은 오른손이니까. 연주하면서 내가 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으려고 노력하지만, 바쁜 손가락에 신경 쓰다 보면 놓치기 쉽다. 잘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는 녹음을 하고 다시 들어본다. 모든 음에 동일한 힘을 주어야 물이 잘 흐르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아도 다섯 손가락이 기본적으로 가진 힘이 다 다르기 때문에, 미세하게 힘 조절이 필요하다. 약한 네 번째 손가락은 조금 더 힘을 주고, 원래 힘이 센 엄지는 힘을 좀 빼면서, 그렇게 악보의 세 쪽을 쉬지 않고 연주하면 중간부로 넘어간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중간중간 물이 새기도 넘치기도 한다. 잘 될 때까지 몇십 번을 반복한다. 반복 연습만이 답이다. 너무 반복했더니 손가락이 얼얼하고 땀이 찬다. 땀나긴 하네.


연습 없이 무대에 설 수는 없다. 소년들도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무대에 서려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노력해야 한다. 하루에 두 시간씩 연습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두배 이상으로 연습시간을 늘려야 할 터. 게다가 모두가 나만 바라보는 조용한 무대에서 피아노를 혼자 연주해야 되니, 상상만으로도 긴장된다. 선생님은 '평소에 연습할 때는 잘했는데 무대에서는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떤 연주자도 마찬가지라며, 연습을 많이 하는 것 외에는 믿을 게 없다고 한다. 이렇게 피아니스트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을 애초에 왜 하겠다고 했는지, 가을쯤 계획하고 있는 리사이틀이 슬슬 두려워진다.

천하의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무대 전에 몹시 긴장한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봤어요. 사진 : 싱글리스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악보를 다시 펼치는가. 김영하 작가는 본인의 책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은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 놓는다고 했다. 그는 다시 현재를, 오직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어디론가 떠난다며 여행의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같은 이유로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 떠오를 틈이 없다. 오직 여든여덟 개의 하얗고 검은 건반과 그곳을 오르내리는 내 열 손가락만 보일 뿐이다. 제법 듣기 좋게 연주가 잘 되는 날에는 그 소리에 행복하고, 손가락이 자꾸 꼬이는 날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바로 그 문제를 풀어내려 애쓴다. 마치 우리가 여행지에서 보이는 풍경에 감탄하고, 뭔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자리에서 해결하고 넘어가 버리는 것처럼. 그것 말고는 없다. 그저 현재,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뿐이다.

여행의 이유, 저도 이렇게 글을 쓰고 싶네요...

그렇게 나는 피아노로 매일 여행을 떠나 온다. 이 여행에서 나는 지금을, 바로 지금을 살고 있음을 느낀다. 시간이 지나 언젠가는 소년들처럼 무대에서 날아오를 수 있을 그 날을 꿈꾸며 오늘도 피아노 앞으로 진격한다.

'진격의 방탄'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진 : NEWS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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