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기생충은 열려 있다

by 박아나

영화 '기생충'을 봤다. 어렸을 때는 칸 영화제 같은 3대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들이 어렵기만 해서 피하기도 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게 된다. 기생충은 황금종려상을 받은 데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믿고 보는 배우들이 나오니, 보지 않을 수 없다.

1968년에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남과 여'. 어른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나에게는 좀 어려웠습니다... 사진:오마이뉴스

영화 보기 전에, SNS에 올린 먼저 본 사람들의 평은 읽지 않으려고 했다. 지난번에 카페 옆 테이블에서 밑도 끝도 없이 들렸던 한 마디, “아이언맨 00 데!”라는 그 스포일러 때문에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우울한 마음으로 봤던 기억이 있다. 아이언맨의 미래를 당당하게 알려준 그분은 같이 온 친구들의 만류에도 계속 스포일러를 쏟아냈고, 난 벌떡 일어나 카페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당할 수 있으니 기생충과 관련한 이야기는 웬만하면 읽지 않으려고 했고, 거의 백지상태에서 영화를 봤다.

엔드게임 보실 분들은 다 보셨죠...? 사진 : IT 조선 (월드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영화가 끝나고 묵직한 감정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이런저런 궁금증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수석의 의미는 무엇인가, 냄새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왜 아이는 인디언 놀이에 꽂힌 건가. 속고 속이는 게 저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일인가. 나름대로 해석을 해보지만 제대로 짐작한 걸까.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지만, 이 말이 때론 고마울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

영화 기생충의 문제의 수석. 사진 : iMBC (CJ엔터테인먼트 제공)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는 그 어떤 장면도 허튼 것이 없다는데,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이제 영화를 봤으니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어봐도 괜찮을 것 같아 인터넷을 검색했다. 영화 전문 기자부터 블로거까지, 모두 다 마치 감독의 머리에 들어갔다 나온 것같은 명쾌한 분석에 놀란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영화 해석 천재인가. 상징과 은유의 아리송한 언어들을 어쩜 이리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해석명 놓았을까.

진짜 손뼉 치고 싶을 정도였어요. 사진 : 뉴스컬처

처음에는 진맥을 잘하는 명의를 만난 것 같았다. 나도 몰랐던 나의 아픈 부위를 구석구석 알려주니 고마웠다. 그러나 그 진맥은 의사 선생님의 진맥이지, 나의 진맥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진단과 해결은 아닌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명쾌하게 들리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무슨 이야기였는지 정확히 전달할 수 없는 것처럼, 영화 리뷰도 그랬다. 모두의 이야기를 흡수하고 나니, 다 아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도 모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새로운 곡을 시작하게 되면 어느 순간 받게 되는 질문, “이 부분은 어떤 느낌으로 표현해야 될까요?” 물론 전체적인 빠르기라든지, 리듬의 흐름이나 악상 기호들을 보면 대충 감이 오긴 하지만, 나 같은 초보 연주자는 음을 틀리지 않고 빨리 익히는 데만 신경을 쓸 뿐 별 생각이 없다. 그러다 차츰 곡이 손에 익으면, 그제야 선생님의 그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처음에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는 대답을 망설였다. 일단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내가 받은 느낌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답을 얼버무리고 나니, 다음 레슨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나는 잘 모르겠으니, 명연주자들의 연주를 듣고 거기서 힌트를 얻거나 그들의 표현을 따라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음 레슨 날,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조성진이 연주하는 환상곡을 들어보니까 여기는 이렇게 표현했더라고요, 같은 빠르기인데, 임의로 변화를 줬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좀 빨리 쳤어야 됐는데, 잘 안 되네요.” 선생님은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내 생각이 궁금하다고 했다. 내 생각이요.... 잠시 시간을 끌며 생각해 본다. 내 생각은... 나는...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빠르기로 변화를 주는 것보다는 뭔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면 더 좋을 것 같았다. 다른 방법이 딱 떠오르지 않아서 그게 문제지만. 선생님은 좀 더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라는 말과 함께, 다른 연주자의 것을 따라 하는 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라 그 이전에 내 생각대로, 내 느낌대로가 먼저라고 주문한다.

모차르트 환상곡을 연주하던 피아니스트 조성진.

처음에는 어려웠다. 뭔가 가이드라인이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연주자들의 음반에 손이 갔다. 그래도 꾹 참고 연습에 집중했다. 지금은 내 느낌이 먼저니까 그것부터 챙기자 마음 먹으면서. 이 음과 다음 음은 왜 이렇게 거리가 떨어져 있을까. 여긴 왜 갑자기 소리가 작아질까. 작곡가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 있지 않을까. 같은 마디도 조금씩 바꿔서 연습한다. 소리에 집중하니 소리가 들리고, 소리가 들리니 그 안의 소리도 들린다. 작곡가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런걸까. 아니, 내가 전하고 싶은 작곡가의 이야기가 조금씩 들리는 것 같다.

눈을 가린 이 포스터가 강렬히 와 닿는 것처럼, 다른 데 눈 돌리지 않고 내 연주를 들어봅니다. 사진 : 봉황망 코리아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던져진 수많은 상징과 은유들이 작곡가의 곡 안에도 숨겨져 있다. 봉준호 감독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기에 영화 관련된 정보도, 그의 영화에 담긴 해석들도 차고 넘친다. 반면에 예전에 살았던 모차르트니, 쇼팽이니, 베토벤이니 이런 작곡가들의 이야기는 지금처럼 충분치 못하다. 그러나 정보가 많다고 다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정보가 없다고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표현 방식은 다 다르다. 애초부터 맞고 틀리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기생충과 요즘 내가 연습하는 모차르트 환상곡은 열린 결말이다. 우리 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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