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by 박아나

엄마의 등쌀에 못 이겨 피아노 학원에 다닌 경험이 있을까. 내 또래의 친구들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가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피아노 치는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이었고, 피아노가 좋든 싫든 한 번씩은 띵똥거리고 넘어가야 했다.

호로비츠를 위하여.jpg 옛날 피아노 학원 다니던 시절이 생각나던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물론 주인공 아이와 같은 재능은 없었지만... 사진 : 마이데일리

내게 피아노 학원 가는 길은 때론 즐겁기도 했지만, 때론 마음이 불편한 길이었다. 선생님이 열 번 연습하라고 해서 열 번 연습했으면 임무를 잘 수행했기에 안심이었고, 열 번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열 번 했다고 속여 양심에 찔렸기 때문이다. 부실하게 연습한 나의 상태를 선생님이 금방 눈치챘기 때문에 어차피 속여봤자 소용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정직하게 연습한 날보다는 한두 개씩은 나를 봐준 경우가 더 많았음을 고백한다. 나가서 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피아노 앞에 앉은 나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뭐가 됐든 그렇게 나를 달래 가며 초등학교 시절을 피아노와 함께 보냈고, 피아노와 이별했다.


공부에 찌들어, 사회생활에 시달려, 음악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내주는 어깨에 우리 삶의 무게를 내맡긴다. 그렇게 다양한 음악을 즐기거나, 혹은 잊고 살다가,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조엘의 ‘The stranger’ 전주 부분을 황홀하게 듣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 나도 피아노 칠 줄 아는데... 유년 시절에 배웠던 피아노는 이방인이 웅얼거리는 휘파람 소리처럼 멀게 느껴진다. 영화 ‘라라랜드’에 빠졌다. 라이언 고슬링 같은 느낌이 나오기는 힘들지만, 피아노는 왠지 쳐보고 싶다. 충동적으로 악보를 샀다. 그냥 모셔 둔다.

라라랜드4.jpg 영화 '라라랜드'의 라이언 고슬링. 사진 :뉴스컬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예전에 누군가가 피아노는 자전거처럼 한 번 배워두면 잊어버리지 않는 경험이라고 했다. 뭐 틀린 말도 아니고, 자전거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피아노는 그냥 경험이라고 하기에는 간단치만은 않아서, 우리가 자전거처럼 쉽게 올라 타지는 못하는 것이다.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도 호기롭게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먼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피아노가 집에 없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있었던 피아노는 몇 번의 이사와 함께 사라졌다. 이사할 때마다 가장 신경 써서 옮겨야 하고, 추가 비용을 내야 하며, 자리도 많이 차지하는데,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 짐짝 같은 존재로 전락한 지 오래다. 피아노 의자 위에는 옷들이 걸쳐져 있고, 메트로놈만 있어야 할 피아노 위에 화병에, 책에, 정체모를 물건들이 얹어져 있다면, 피아노는 더 이상 피아노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지. 그렇게 몇 해를 버틴 피아노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 떠난다. 조금 서운했지만 눈물까지 날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는 다른 곳으로 가는 게 피아노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떠나보낸 피아노를 다시 집에 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한 번의 실패의 경험이 있고, 또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 이미 피아노 아니고서라도 괜한 일을 벌였다 후회한 경험은 충분하다. 뭐 긴 말 필요 없이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피아노는 비싸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사주실 때는 어려서 가격이 얼마인지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내가 사야 한다. Steinway & Sons의 그랜드 피아노는 꿈도 꾸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꿈은 꾼다. SNS에서 이 브랜드를 팔로우를 하고 있는데, 자꾸 리미티드 신상 피아노를 올려 현혹시킨다. 보는 데는 돈이 들지 않으니까 보기만 한다.

그랜드피아노.jpg 에보니든 마카사 에보니든...다 좋으니 묻지 마라. 사진 : steinwayandsons 인스타그램

현실을 직시하고 업라이트 피아노를 알아본다. 브랜드마다 다양한 종류가 있다. 물론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새 피아노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중고 피아노에 눈을 돌리는 것도 방법이다. 또 디지털 피아노라는 신세계도 있다. 피아노를 업으로 삼을 게 아니라면, 눈높이를 조금 수정하면, 괜찮은 피아노를 괜찮은 가격에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별 고민 없이 사는 가방이나 옷에 비하면 피아노의 수명은 엄청 기니 절대 돈이 아깝지 않은 선택이라는 확신과 함께. 그래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가격이긴 하다.

피아노의 종류.jpg 피아노의 종류는 크게 이렇습니다. 사진 : 퍼스널 뮤직 공식 홈페이지

피아노 구입을 망설이는 결정적 이유에는 소음 문제도 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윗집, 아랫집, 옆집에서 나는 소리에 덜 민감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 않다. 피아노를 낮에만 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방음벽을 설치해야 할 정도로 미친 듯 연습할 것 같지도 않다. 나도 이 소음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이웃에 방해를 주기도 싫지만, 나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렇지만 피아노를 제대로 치려면 피아노가 집에 있어야 한다. 시설이 좋은 피아노 연습실도 많이 생겼고, 나도 좀 다녀봤지만, 솔직히 귀찮다. 피아노 연습하는 것도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인데, 연습실까지 가는 건 더 큰 일이라, 처음에 넘쳤던 의욕이 점점 꺾기더라.


엄청나게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라면, 집에 피아노가 있어야 피아노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크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디지털 피아노를 선택했다. 헤드폰을 끼고 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소음 문제는 확실히 해결되는 데다가 녹음 기능이 있어 내가 연주한 것을 언제든지 편하게 다시 들어볼 수 있다. 그 외에 여러 가지 기능이 탑재되어있는데, 워낙 기계치여서 웬만하면 건들지는 않지만, 이런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활용도가 더 높을 것이다.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소리인데, 어쿠스틱 피아노와 비교해서 조금은 떨어지는 부분이 있지만, 연습용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고, 자꾸 듣다 보면 익숙해져서 괜찮다. 어떤 사람들은 건반을 누를 때 쉭쉭 하는 소리가 나서 거슬린다고 하는데, 좀 둔해서 그런지 그것도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에, 남들이 깨기 전인 새벽에, 갑자기 피아노가 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 그 어느 순간에도 아무 때나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장점이 무엇이겠는가. 아... 공간도 작게 차지하고 무게도 가볍다는 장점도 덧붙인다.

클라노비아.JPG 버튼만 누르면 시행되는 다양한 기능들이 있다.

이제 피아노를 구비했으니 연습만 하면 된다. 근데 이게 또 그렇게 생각만큼 잘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순전히 피아노에 대한 열망만으로 시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로 큰 마음먹고 다시 피아노 앞에 앉으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뻣뻣한 손가락은 그렇다 치고, 악보 읽는 것도 힘들어졌다는 데도 놀란다. 한눈에 쫘악까지는 아니었지만 거리낌 없이 파악되었던 악보는 미적분 공식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돋보기 안경이 필요하기라도 한 것처럼 악보를 해독하며 건반을 더듬는다. 피아노만 집에 있으면 예전에 연주했던 곡들, 모차르트 소나타니, 쇼팽의 녹턴이니 다 쳐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렸을 때도 연습하기 싫었던 하농으로 손을 풀어보지만, 하농도 꼬인다. 이게 아닌데... 내가 상상하던 그림이 아닌데...


당연하다. 피아노는 자전거 타기가 아니니까. 저절로 된 것 같지만, 어렸을 때 학원 선생님에게 야단맞아가며, 엄마의 잔소리를 참아내며, 연습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피아노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 사이 세월은 너무 많이 흘렀고, 손가락 운동이라고는 노트북 자판 두들기기가 전부였다. 내 일상의 새로운 기쁨이 아닌 "좌절"로 등극한 피아노, 그런 피아노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단순히 취미로 연주하는 것이 지속 가능하다면 너무 좋은 일이지만, 그런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은근한 끈기가 내게 별로 없지 싶다. 그래서 나는 목표를 세웠다. 열심히 연습해서 언젠가는 연주회를 갖겠다는 목표를. 처음에는 다소 허황된 것 같다는 생각에 지인들에게 말할 때도 '나 웃기지?'이러면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나 말의 힘인지, 목표의 힘인지, 그 무엇의 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꼭 이루고 싶은 마음도 자꾸만 커진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연습시간을 더 늘리고, 연습할 때도 시간을 채우는 것보다는 어떻게 연주해야 좋을지 많이 고민한다. 그렇게 6개월의 시간이 지나가고, 예전과 비교하면 많이 늘었다는 것을 느낀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연주회까지 남은 기간을 꾸준히 열심히 하면 지금보다도 더 늘겠지. 그럼 더 신나서 더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치겠지.


목표는 다양하다. 부모님 칠순 때 가족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목표일 수 있고, 그 어렵다는 쇼팽의 발라드 1번만 파는 것도 목표일 수 있다. 취미도 목표가 있어야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흥미를 잃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쪽이기 때문에 목표가 높으면 높은 데로, 금방 실현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런 데로,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피아노를 다시 시작해 무사히 안착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존재는 피아노 선생님이라는 것. 우리에게 연습할 시간이 마냥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노력할 기운도 달리니, 전문가의 도움이 있어야 헤매는 것을 줄일 수 있다. 예전에 어떻게 보면 일방적인 교습을 받아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떠올리면 좋은 기억이 없어 피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선생님도 달라져 쌍방향 소통하는 수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피아노로 진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피아노 실력은 예전 같지 않아 의외로 듣게 되는 말, 음악적 감수성과 이해력이 있다는 칭찬을 듣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다.

고래춤.jpg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피아노를 잘 치게 하겠지. 사진 : 아시아경제

그럼 이제 피아노를 다시 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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