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평온한 그대

by 박아나

과거의, 그러니까 몇십 년 전의 나는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중에서도 확률 문제에 꽤 집착했었는데,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는 일이 재밌었다. 다른 문제를 풀 때보다도 확률 문제를 잘 풀어냈을 때의 희열이 더 컸는데, 국어 문제처럼 긴 설명이 주어지는 확률 문제의 형식이 좋았던 것 같다. 수학인데 뭔가 더 친절한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 문제안에 숨겨진 힌트를 찾아내는 재미에, 이런저런 상황을 가정하고 설계해보는 문제풀이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지난번에 서점에 갔다가 확률 문제집을 보고 사서 풀어볼까 하는 충동을 잠시 느꼈지만, 나의 뇌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수학적으로 써본 적이 없으니 뇌가 놀랄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옛사랑은 추억으로만 기억하는 게 최선인 것처럼 그냥 좋아했던 걸로, 그렇게 기억하자.

추억의 정석... 저자인 홍성대 이사장이 요즘 뉴스에 나오는 상산고 설립자네요. 사진: 쿠키뉴스

과거의, 그러니까 몇십 년 전, 수학의 확률 문제에 손을 대기도 전에 나는 피아노를 연주했었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는 게 내 좋은 데로 편집돼서 정확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지만,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것만은 분명하다. 세월은 무지막지하게 흘러서 내 뇌에도, 내 손가락에도 피아노를 잘 쳤던 흔적은 많이 흐릿해졌지만,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였다. 작년 12월에 지금의 선생님과 레슨을 처음 시작하면서 연주회를 갖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고, 올해 11월에는 정말로 연주회를 열 계획이다. 정말 계획으로만 있었는데, 요즘은 연주회를 어디서 열 것인지, 어떤 레퍼토리를 연주할 것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오가는 걸 보니 하긴 할 건가 보다.


지난주 레슨 중에 연주회 이야기를 나누면서 덜컥 드는 생각은 ‘내가 좀 무모했었나’이다. 피아노 전공자도 아닌 내가, 그것도 한참을 쉰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연주회를 열 생각을 했을까. 전공자들도 연주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연주회날에는 본인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긴장한다는데... 과연 내가 잘할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확률적으로 계산이 되는 것이긴 한가. 다가오는 11월이 점점 두렵게 느껴진다.

무대 위에서 거침없이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랑랑도 긴장할까요? 손부상에서 회복돼 돌아와 다행입니다. 사진 :매일경제

이미 충분히 속으로 걱정하고 있는 내게, 선생님도 앞으로 두 달 동안은 연주할 곡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그러고 나서 연주회 전까지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문한다. 모든 악기가 나름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근하는 피아노가 사실은 가장 다루기 힘든 악기라는 선생님의 말이 뭔지 희미하게 알 것만 같다. 누구나 소리를 낼 수 있지만, 그 소리가 모두를 감동시킬 수는 없는 법이고, 특히 피아노는 부단한 훈련의 과정을 기본으로 뛰어난 기교 속 예술적 감수성, 그 어느 한 부분이라도 기울면 인상적인 연주를 할 수 없다. 연주회를 하겠다고 준비하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말에 제가 너무 용감했던 것 같으니 그냥 하지 말까 봐요... 벌써부터 비장하면 너무 떨릴 것 같아 실없는 농담을 던져 보지만, 재미가 없네. 뭐가 됐든 내가 좋아했던 확률 문제의 단골 소품이었던 주사위는 던져졌고, 숫자가 뭐가 나오든 간에 해보긴 할 테다.

주사위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부루마블 게임. 어릴 때 세계 여행 많이 했죠. 사진 : nsp통신


이렇게 속으로는 의지를 불태우지만, 겉으로 보이는 나는 무척 평온해 보인다. 사실 나는 심보선 작가의 표현처럼 ‘물병자리가 바라보는 삶의 의미’ 학술 대회에 나갈 기세로 삶의 의미도 고민해야 하고, 인류에 대한 걱정도 해야 하는 진정한 물병자리다. 그런 이유로 친구들이 나를 더 느긋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자기 삶에 대한 걱정으로도 벅찬데 이런 쓸데없는, 물론 나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도 깊게는 아니어도 얕게라도 붙잡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내 문제 말고도 다른 것들까지 신경 써야 되니 어쩌면 나의 마음은 생각보다 평온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병자리라서 반가워요, 작가님. 사진:문학동네

나는 그럼 지금 평온하지 않은가. 내게 평온한 마음 상태는 행복과 연결돼 있다. 제목이 정말 제대로 지어진 것인지 의심스러운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주인공 라짜로가 내내 짓고 있는 그 표정처럼 평온한 마음. 그러나 이 평온한 마음은 생각보다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다른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평온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평온하지 않을 때만 절실해지는 그것. 그래서일까. 내가 정말 평온했는지는 그때가 지나고 나야 간신히 깨닫는 경우가 많다.

라짜로의 마음도 정말 평온했던 것일까. 그는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내내 이런 순진무구한 표정이다. 사진: 뉴스포인트

평온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평온하지 않았던 시간들도 물론 존재한다. 회사라는 곳에 매일 출근하던 시절, 모든 것들이 꽤 정확하게 돌아가던 시절의 나는 어땠는가. 그때 나는 평온한 줄 알았지만, 실제로 평온하지 않아서 아팠다. 그리고 평온한 삶에서 빠져나와 청개구리처럼 평온하지 않아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불확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 나의 삶은 예상대로 평온하지 않은가.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시간들이 어땠는지 알게 되려나.


지금이 평온하든 그렇지 않든, 지금의 나는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고, 연주회라는 목표가 확실히 생겼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래서 가끔 실수하면 어쩌나, 괜한 일을 벌이는 건 아닌가 싶어 내 평온이 위협받기도 하지만, 피아노에 몰입하는 순간에는 어쩐지 내가 근사해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무엇인가에 몰입해 본 기억이 얼마만인지. 도통 풀리지 않는, 그렇지만 꼭 풀어내고야 말 확률 문제를 붙잡고 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땀을 흘리며 할 수 있는 건 운동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집중해서 연습하다 보면 어느새 땀이 흐른다. 여름이니까 연습실이 더워서 흐르는 땀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땀들이 모여 연주회가 열리는 어느 11월에는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게 연주하고 싶다.

두 시간을 쉬지 않고 피아노 연습을 하고 나면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러니 부디 이 평온의 기운으로 그날, 연주회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내가 준비한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그 날, 평온하게 잘 연주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훗날 피아노와 함께 하는 지금의 시간들을 평온의 시간들로 기억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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