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트래블노트 1

by 박아나

밀라노에서 지하철을 탔다. 이곳 사람들은 어떤 얼굴인가, 어떤 차림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가. 실례인 줄 알면서도 자꾸 눈길이 간다. 캐러멜색으로 그을린 피부. 친퀘테레나 카프리 섬에 다녀온 걸까. 하루 이틀 태운다고 저리 되는 것은 아닐 테고 세월이 만든 색이다. 태양이 일상인 것처럼 그렇게 피부도, 시간도 함께 익어간다.

친퀘테레, 베르나짜...

고개를 드니 누군가의 눈빛과 마주친다. 익숙한 이목구비가 창에 반사돼 돌아온다. 팔자주름이라고 해야 되나. 입가에 세월의 흔적이 또렷하게 비친다. 매끈했던 나의 얼굴에 언제 저런 굴곡이 생긴 걸까. 앞으로는 더 선명하게 보일 테지만, 그래서 더 익숙해져야 될 것들이지만, 아직은 낯설다.


세월이 야속하지만 그렇다고 원망만 할 수는 없다. 매끈한 피부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얻은 것도 있지 않을까. 내가 살아온 흔적이고 역사인 나의 주름들을 내가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로 여긴다면 말이지. 좁았던 안목이 넓어졌고, 다른 사람들에게 덜 흔들리게 됐고, 감정도 나름 풍부해지고 섬세해졌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한 점들이 나의 일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있고, 피아노 연주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뭐든 확신하고 싶은 불안한 나이다.


드뷔시 아라베스크 1번. 나는 이 곡을 잘 안다고 생각, 아니 확신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줄리어드에서 수업을 들었을 때 부지런히 연습했던 곡이다. 그래서 이번 연주회에도 예전에 연주했던 곡 중에 자신 있는 곡을 한 곡 고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에 이 곡을 바로 꼽았으니까. 내게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는 오랜 친구 같은 편안한 곡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학생 시절 듣도 보던 화음을 만들며 약간의 반항아 기질이 있었던 드뷔시. 사진 : 매일경제

지난 레슨 시간에 선생님 앞에서 아라베스크 1번을 연주했다. "어떻게 연주하고 싶으세요?" "아... 네... 뭐..." "어떤 느낌을 전달하고 싶으세요?" 선생님의 이런 질문은 매번 당황스럽다. 잠시 머뭇거리다 말한다."저는 이 곡이 물을 묘사한 것 같아요. 작은 물이 모여 큰 물이 됐다 다시 작아지고... 뭐가됐든 마지막에는 물방울들이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으며 사라지는 느낌으로 끝내고 싶어요. " “그럼 이제부터 그렇게 만들어봐요.” 아...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던 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나를 배신하는 일은 흔히 경험하는 것이다. 가족에게서, 친구에게서, 아니 나 자신에게 조차도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실망한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아라베스크 1번에게도 그런 배신을 경험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아라베스크와 내가 연주하고 있는 아라베스크는 달랐다. 오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는 이 곡을 잘 몰랐다. 잘 알고 있는 곡이라 믿었을 뿐 그 믿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잘 몰랐던 거다.

영화 '친구'도 배신이죠... 사진 : 한국경제 tv

그럼 새로 만나는 친구처럼 처음부터 다시 알아봐야겠지. 일단 드뷔시의 아라베스크 1번은 어떤 곡인가. 프랑스 예술원이 주관하는 콩쿠르에서 최고상인 로마 대상을 받고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온 드뷔시가 파리로 돌아와서 작곡한 피아노 곡이다. 음악에서 아라베스크란 하나의 악상을 화려한 장식으로 전개하는 악곡을 말하는데, 드뷔시는 반복되는 아르페지오로 아름다움을 채웠다. 그 흐름이 마치 물의 흐름과도 같아서 나는 이곡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물이 떠올랐다. 시냇물이 흐르다 점점 강물이 되고, 그 강이 바다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작은 냇물로 흘러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연상됐다.

베네치아... 종탑에서 바라본 산 마르코 광장과 바다

실제로 물과 바다를 좋아했던 드뷔시는 어쩌면 파리로 돌아오기 전에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여행을 갔던 것이 아닐까. 어느 날 불쑥 베네치아로 떠난 아센바흐(토마스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 죽음"의 주인공)처럼.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종탑에서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산마르코 성당을 내려다보며,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보며, 아라베스크풍의 화려한 아르페지오 선율을 떠올리는 거다. 베네치아의 바다는 그동안 내가 봤던 바다들과는 다른 바다의 느낌이었다. 드뷔시도 어쩌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자연의 바다보다는 베네치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춤추는 선율들. 나만의 즐거운 상상을 깨고 싶지 않기에 실제로 그랬는지 팩트체크는 하고 싶지 않다. 유학 생활이 잘 맞지 않아 기한을 다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드뷔시가 이탈리아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 그의 음악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믿는다. 그에게 영감을 주었을 거라고 말이다.

산 마르코 대성당. 화려함을 사진으로 못 담네요...

지금 여기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위를 거칠게 질주하는 바다 갈매기처럼 상상의 날개를 펼쳐본다. 내 마음만큼 내 손이 따라주지는 않지만 언젠가 혹독한 연습의 과정이 지나면 건반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닐 나의 모습도 떠올려본다. 언젠가 내가 연주하는 아라베스크 1번을 듣고 베네치아를 그리워할 그 누군가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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