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트래블노트2

by 박아나

시칠리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아주 막연한 환상이. 이자벨 아자니같이 아주 매혹적인 여성이 그랑블루에서 수영을 하다 만나 사랑에 빠진 상대는 마피아의 아들이었다... 뭐 이런 시답지 않은 상상. 시네마 천국이라는 영화 때문일까. 나에게 시칠리아는 천국 같은 곳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불의 신이 살고 있는 에트나 화산과 물의 신이 살고 있는 푸른 지중해, 뜨거운 태양 사이로 시로코가 불어와 모두를 잠재우는 곳.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것들을 확인하고 싶었다. 게다가 11월에 피아노 연주회를 앞두고 있는 나로서는 피아노와 나만의 고독한 전투가 기다리고 있으니, 섬이 주는 나른한 고독을 미리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에트나 화산. 연기를 내뿜는 활화산의 위엄...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시네마 천국을 여기 오기 전에 봤다. 다시 보니 내 기억 속에 잊힌 장면들이 꽤 많았다.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던 주인공 토토도 이제는 불혹의 나이로 영화 속 성공한 영화감독의 모습만큼 나이 들어 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들은 흩어져 버렸지만,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 흐르는 순간 나의 감성은 영화를 처음 만났던 그때로 돌아간다.

꼬마 토토와 알프레도... 영화 시네마 천국 중에서

영화는 알프레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토토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와 함께 나도 시칠리아의 꼬마 토토를 만나 아련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 한 장면에 등장했던 이곳, 체팔루의 바닷가는 그래서인지 친근하다. 극장의 화재로 실명이 된 알프레도의 뒤를 이어 영상 기사로 일하게 되고, 어느덧 성장한 청년 토토가 연인 엘레나를 한창 그리워하고 있을 때 율리시즈란 영화를 상영했던 바닷가 부두 장면이 촬영됐던 곳이다. 영화 관람에 빠져있던 주민들과는 달리, 토토의 관심은 오직 그의 사랑이 그의 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지겨운 여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영화였으면 벌써 끝나고 폭풍이 왔겠지..." 번쩍! 정말 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진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워하던 엘레나가 돌아와 폭풍 같은 키스를 나눈다.

영화 율리시즈... 1955년에 개봉됐던 진정한 추억의 이탈리아 영화네요. 안소니 퀸도 나오고. 사진 :네이버

체팔루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해변으로 나갔다. 비치 파라솔들로 빽빽한 해변에는 더위를 피해 물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과 더 진해질 색깔도 없는 것 같은데 그야말로 몸을 굽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런 풍경이야 그 어느 해변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시네마 천국의 감독은 여기서 그 장면을 촬영한 이유가 뭘까. 그 이유는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바다에 왔으니 물속으로 들어가자. 차가운 느낌은 잠시, 내 몸은 이 바다의 온도에 금방 맞춰진다. 기분 좋게 넘실대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저 멀리 해변을 바라본다. 아... 구시가의 오래된 건물들이 바다 안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는 그들을 품었고, 그들은 바다를 품었다. 여기에 병풍처럼 이 모두를 내려다 보는 로카, 바위산이 체팔루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바다 위에서 바라본 체팔루의 해변. 멀리 보이는 로카, 바위산이 수호신처럼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약간 정신 나간 아저씨가 이 광장은 내 거라고 계속 소리치고 돌아다니는데, 그 아저씨의 말처럼 체팔루의 바다는 그 아저씨를 비롯한 주민들, 모두를 위한 바다였다. 생계를 위해 그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부둣가에서 영화도 보고, 사랑하는 연인과 재회도 하는 모든 것을 품은 바다. 그게 바로 체팔루의 바다였다. 해변가에서 이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다와 주민들의 생활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그 경계마저 모호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촬영했어요...

체팔루에 오기 전에 타오르미나의 바다를 보고 왔는데, 그곳의 바다는 여기에 비하면 뭐랄까, 도도하다. 이솔라 벨라를 품은 아름다운 해변에 가려면 저 높은 산 위에서부터 케이블카를 타고 한참 내려와야 하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바다이다. 처음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아 토토를 애태우던 엘레나처럼. 체팔루의 바다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포근한 바다이다. 주민들에게, 멀리서 찾아오는 외지인들에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토토와 엘레나의 마음으로 일렁이는 바다이다.

저 아래 타오르미나의 해변... 내려가기 힘들겠죠? 케이블카가 있긴 해요.

8월의 이곳은 휴가철이라 해변은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북적댄다. 사진을 찍고 싶어도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많아서 원하는 장면을 손에 넣기 쉽지 않지만, 벤치에 자리를 잡고 물끄러미 반대쪽 해변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시네마 천국의 사랑의 테마가 자동적으로 재생된다. 이곳에 피아노 한 대를 놓으면 어떨까. 그리고 노을 지는 바다를 보며 멋지게 피아노를 연주하면 어떨까. 여기는 정말 천국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