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트래블노트 3

by 박아나

처음으로 대관 신청서라는 것을 작성했다. 아직 확정됐다는 답변을 받지는 못했지만, 이제 정말 그날이 현실로 다가오는가 보다. 대학 입시 원서를 쓸 때의 비장함도 밀려온다. 마음은 한껏 무겁고, 준비해야 할 일도 많은데, 도통 집중이 되지 않는다. 며칠 전 다녀온 여행 후유증 때문인가 핑계를 대본다. 그래, 아직 시차 적응도 제대로 안돼서 정신이 몽롱하긴 하다. 여행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때의 기분으로 자꾸만 빠져들고 싶다. 모든 여행은 아무리 잘 즐기고 왔다고 해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야, 다시 떠날 핑계가 생기니, 어쩌면 자동적으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다.

곤돌라.JPG 또 타고 싶다, 곤돌라.

이번 베네치아 여행은 말 그대로 정말 아쉬웠다. 예전에도 아쉬웠다. 대학생 때 배낭여행으로 베네치아에 온 적이 있었는데, 몸이 아파서 숙소에서 그냥 쉬었다. 베네치아가 어땠는지 궁금했던 나는 구경을 다녀온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피자는 맛있었어. 광장에 비둘기 많더라.”라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다. 못 나간 나를 위로하려고 배려했다기에는 다들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베네치아가 그렇게 큰 감동은 아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베네치아는 내게 줄곧 그런 이미지여서, 이탈리아에 갈 기회가 있어도 일정에 넣지 않았다. 그리고 이십 년이 흘렀고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베네치아 비둘기.jpg 내가 생각해온 베네치아 이미지, 비둘기... 사진 : 동아일보

일단 이번 여행에서 느꼈던 아쉬움을 적어본다. "이탈리아 기행"에 괴테가 묘사한 것처럼 산마르코 종탑에 올라 밀물과 썰물 때의 석호의 모습을 둘 다 보고, 두 그림을 결합시키지 못했다. 나는 한 번 밖에 올라가지 않았으니까. 사람 많아지기 전에 이른 아침에 곤돌라를 타느라 뱃사공 아저씨, 곤돌리에의 목소리가 덜 풀려서 뱃사공의 노래를 제대로, 그것도 은은한 달빛 아래 분위기 있게 들어보지 못했다. 뜨거운 햇빛에 정신줄을 놓았는지, 헤밍웨이가 단골이었다던 해리스 바의 문턱도 넘어보지 못했다. 사악한 가격으로 악명 높긴 하지만, 복숭아빛이 감도는 벨리니 칵테일과 얇게 저민 카르파치오를 탄생시킨 진짜 원조를 그냥 지나치다니. 베네치아와 나의 인연은 이렇게 스치듯 안녕인 것인가.

해리스바.jpg 오! 마침 벨리니 칵테일을 만들고 있네요. 원조는 다른가요? 사진: the dabbler

밀라노에서 베네치아로 떠나는 아침에 컨디션이 영 안 좋았는데, 감기에 걸렸다. 베네치아에 머무는 동안 콧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목이 아프고 기침을 많이 했다. 열이 나서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굴할 수 없었다. 내가 베네치아와 뭔가 잘 맞지 않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아프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물러설 수는 없으니까. 비좁은 베네치아의 골목에서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갈 곳이 어디인지, 계속해서 헷갈렸지만 꿋꿋이 다녔다.


드넓은 광장으로 나오니 다리가 풀리면서 잠시 쉬는 것도 좋겠다. 산 마르코 광장의 비둘기들이 나를 덮칠 기세였지만 굴하지 않고, 광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카페 플로리안에서 달달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플로리안은 괴테와 니체, 찰스 디킨스 등이 찾았던 유명한 카페로 헤밍웨이의 소설 “강 건너 숲 속으로”에도 언급됐던 곳이다. 지금의 관광객들은 해가 어느 쪽에 떠 있느냐에 따라 카페 플로리안이냐, 아니면 반대편에 있는, 바그너가 자주 들렀다던 라베나로 갈지 결정할라나. 여하튼 나는 그늘이 진 플로리안을 택했다.

플로리안.JPG 플로리안에 앉아서 바라본 산마르코 광장.

컨디션 난조의 영향도 있었지만, 베네치아라는 도시를 이틀 동안 돌아다니면서 파악하겠다는 내 생각은 설계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괴테도 2주 넘게 베네치아에 머물렀고, 모차르트도 20일가량 있었다고 하니까 그들보다 식견이 부족한 내가 이틀 만에 베네치아를 제대로 경험할 수나 있는 일인가. 짧은 일정에 탄식이 나오고 있는데, 곤돌리에가 모차르트가 가족들과 머물렀다는 집을 손짓으로 알려준다. 그 바람에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괴테가 머물렀던 집도 곧이어 나타난다. 다들 유럽 사람들(?)이라서 베네치아에 오는 일이 어렵지 않아 보이지만, 그 옛날에는 비행기가 없었으니, 걸린 시간이 만만치 않았겠다. 역시 남의 나라 여행은 쉽지 않다.

괴테.JPG 괴테가 언제 머물렀는지 날짜까지 나오는데, 잘 보이려나요.

괴테는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을 시칠리아까지 이탈리아 전역을 여행했고, 모차르트는 35년의, 그의 짧은 생애 중 3분의 1을 이탈리아를 포함해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다. 괴테도 그렇고, 모차르트도 그렇고, 그들이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어서 훌륭한 작품을 많이 쓴 것도 있겠지만, 베네치아에서 본 것들이, 또 다른 곳에서 경험했던 여행들이 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자극을 얻고 이를 작품에 반영한다. 혹시 집에 있으면 자꾸 산만해지는 나 같은 타입일까 하는 불온한 상상도 해본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진척이 없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지는 건 예술가든, 누구든 다 마찬가지겠지만. 뭐가 됐든, 우리는 늘 떠나고 싶어한다.


여행의 욕구는 나의 식욕처럼 잘 줄어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나는 당분간 어디론가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없어야 한다. 피아노 연습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서다. 여행을 가면 시차 적응만 안 되는 게 아니라 손가락 적응도 어려워진다. 이번 여행에서 일주일 만에 피아노를 연주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무려 피카소를 비롯해 저명한 예술가들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타오르미나의 빌라에서였다. 멋지게 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었지만,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엉성한 손놀림만 선사했다. 앙드레 지드니, 테네시 윌리엄스니, 많은 문학계 인사들이 글을 쓰기 위해 찾은 조용한 이곳에 괜한 소음만 남기고 떠나는 것 같아 무척 민망했다. 역시 연습은 매일 해야 되는 것이었어.

타오르미나 피아노.JPG 타오르미나 카사 쿠세니에서 만난 피아노, 반가웠다.

근데 당분간이긴 하지만, 어디론가 떠나는 일이 없어도 괜찮긴 할까. 영감이 문제라면, 이번 여행을 계속 되새김질하는 것만으로도 당분간은 넘치도록 충분하다. 매번 아쉬운 베네치아도 그렇고, 처음이었지만 강렬했던 시칠리아의 여운이 길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실, 뭐 솔직히 말하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영화나 책을 통해서 얼마든지 새로운 자극은 공급된다. 게다가 내게는 강력한 영감의 원천, 피아노가 있지 않은가. 그래, 이제 정말 피아노에 집중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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