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8, 다시 피아노에 도전하다

다시 만나는 추억, 다시 만나는 피아노

by 박아나

살아온 시간이 점점 많아지니 추억도 함께 늘어난다. 그러나 모든 추억을 다 기억할 수는 없는 법. 추억이 남긴 느낌들만 희미하게 남거나 그마저도 사라진다.

여의도 MBC.JPG 허물기 전에 찍어 둔, 지금은 사라진 여의도 MBC .

내 삶에서 지분을 따지자면, 한때는 전부였을지도 모를 곳에 서 있다. 퇴사를 하고 나서 회사 앞마당에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을 일이 생기게 될지는 몰랐다. 그것도 이런 이유로. 선배 한 분을 잃어버렸다. 예전 파업 때 조합일을 하다가 결국 해고되고, 힘든 과정을 거쳐 복직은 됐지만, 선배의 몸에는 이미 암세포가 퍼져 있어 손을 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선배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뉴스를 진행하면서 그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렀기에 나에게는 친숙한 선배였고, 파업 때 우리 앞에 대표로 서 있던 그를 보며, 저 자리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려나 걱정이 되었던 선배였다.

사우장.JPG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말고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선배님...

예전 일들이, 기억들이, 사우장이 진행되는 한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떠오르고 사라진다. 사람들, 그러니까 옛 동료들의 뒷모습을 조금 떨어져서 바라본다. 그들의 하얘진 머리만큼이나 시간은 흘렀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들을 짊어진 그들의 어깨도 무거워 보인다. 괴로움이 여전하든 아니든,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군가의 말처럼, 이 자리에서 뭔가가 매듭지어지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뭘까. 누군가를 보내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 설명해야 할까, 복합적인 감정이 나를 감싼다. 나는 이제 옛 추억들을, 그것이 좋았든 그렇지 않았든, 그것을 더 이상 붙들지 않겠다. 그렇게 예전의 나를 놓아준다.


동료들과 나는 이제 다른 길로 들어서고 있다. 아니, 이미 들어서 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그것은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이 나의 근황을 묻는다. 내가 연주회를 한다니까 하나둘 피아노에 대한 추억을 소환한다. 자로 손등을 맞아가며 연습했던 한 선배는 악보를 외우는 일이 정말 싫었다고 한다. 선배의 피아노 선생님은 마디마디 번호를 다 매겨 어느 마디에서 시작해도 완벽하게 외울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고 한다. 그때 키운 암기력으로 여전히 피아노 선생님의 이름까지 기억하는 건가. 악보를 읽을 줄 몰랐던 다른 선배는 어쩔 수 없이 곡을 외워서 쳤었는데, 결국은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걸 고치다 진이 빠졌다고 한다. 곡을 들으면 바로 악보로 옮겨 적어야 직성이 풀렸다, 어린이 음악 경연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괜스레 기가 죽는다. 아니, 모두들 어렸을 때 피아노 좀 쳤던, 음악 천재들 아닌가. 난 예전에 이렇다 할 기억도 없고, 심지어 한 번 나간 콩쿠르에서도 뚝 떨어졌는데, 평범한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제 와서 연주회를 열겠다고 한 걸까.


돌아오는 길에 처음 피아노를 시작했던, 어렸을 때 추억이 남아 있는 곳을 지나친다. 평소에는 차를 타고 그 길을 지나갔었는데, 아침부터 느꼈던 묵직한 감정들이 나를 걷게 만든다. 걷다 보면 조금 가벼워질라나. 어릴 때 다니던 교회가 보인다. 지금은 현대식 신축 건물이지만, 그때는 검은 회색빛의 돌담 건물이었다. 피아노 학원 가방을 던져두고 교회 밖에서 요리조리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었다. 진한 돌담색 때문이었는지, 주변이 더 어두워 보여 약간 무서움을 느끼며 집으로 뛰어 돌아오곤 했다. 피아노 학원이 있던 종합상가 건물에서 펩시 콜라 시음회가 있었던 날도 기억이 난다. 눈을 가리고 두 가지 콜라를 맛보고 그중에 어떤 콜라가 펩시 것인지 맞추는 거였다. 엄마 등에 떠밀려 도전했는데, 못 맞췄다. 한번 더 기회를 얻었는데, 또 못 맞췄다. 맞히면 펩시콜라 로고가 새겨진 연필을 받을 수 있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엄마가 도전해서 기어코 연필을 받아냈다.

펩시.jpg 약간 이런 식... 펩시냐, 코카냐... 난 코카 콜라를 더 선호했던 거다. 사진:Jameson Fink

참 이상하다. 이런 자잘한 것들은 기억이 나는데, 피아노에 대한 기억은 세세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선생님의 얼굴도, 이름도, 내가 다녔던 학원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 많은 시간을 연습했었는데 아무 생각이 없었나. 어렸을 때 꿈이 피아니스트였던 거 맞나, 줄리어드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깜깜하다. 피아노는 내게 특별한 추억이 아니었을까. 사실 그 당시에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은 피아노를 잠깐이라도 배웠으니까. 체르니 100번을 겨우 끝냈든, 50번까지 연습했든, 어디까지 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어느 순간에는 그만두게 되고, 그 이후로 다시 피아노로 돌아오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런데 내가 피아노를 다시 만날 줄이야.

Draft.jpg 다시 만나는 피아노, 많이들 보러 오셨으면 좋겠어요. 부디!

그래, 중요한 것은 현재야. 너만 치고 있잖아. 우린 옛날 일이고. 선배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먼 길을 돌아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리고 11월 23일, 드디어 나의 무대를 갖는다.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날이 확정되고 보니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무엇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올 그날의 무대가 늘 간직하고, 기억하고 싶은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기다려진다. 다시 만나는 피아노. 정말 잘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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