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가운 시선에도 지켜야 하는 것

by 쏘이파파

늦은 오후, 애매한 시간임에도 지하철 객실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시간에 모두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앉기는 어렵겠다고 느꼈는데 운좋게 자리가 나와 바로 앉았다. 혼란스럽게 공수 교대가 이뤄지던 중 내 바로 옆자리에 한 여성도 작은 케이지를 품 안에 안고 조심스럽게 앉는다.


케이지 안에는 아마도 어린 강아지가 들어있는 듯했다. 그녀는 낯선 공간에 초조해하는 강아지를 진정시키기 위해 간식을 내밀고,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보려 애쓴다. 그러나 강아지는 여전히 긴장한 채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뱉어낸다. 어찌 보면, 그 생명체에게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거대한 요동과 낯선 공기, 끝없이 변하는 풍경으로 가득한 미로 같은 곳일 것이다.

혹여나 주변에 피해를 줄까봐 여성은 필사의 힘으로 강아지를 달래본다. 어르기도 하고 손을 넣어 쓰다듬기도 하고 쓰읍 소리를 내며 경고하기도 한다. 한참의 노력에도 강아지의 소리가 더 커지자 이내 지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몸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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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을 바라보는데,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이 묘하게 쓰였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음에도, 왜 이토록 그 곤란함에 가슴이 울리는 걸까?


아마도 부모로서 아이가 예기치 못한 소란을 피울 때 느끼는 불안과 부끄러움, 그리고 그 상황을 어떻게든 잠재우려는 안간힘에 대한 공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은 통제가 쉽지 않다. 그들은 세상의 질서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필요와 감정만이 전부인 듯 울고 떼를 쓴다.

우리 눈에는 중요하지 않은 일도, 그 순간 아이에게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절실한 문제가 되어버린다. 부모는 그런 아이를 진정시키고 질서를 가르치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은 날카롭게 박힌다. 아이가 드러내는 울음소리나 떼쓰기의 혼돈 속에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그 짧은 순간에 ‘내가 상황의 우위에 있다’는 묘한 감각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부모는 마음속에서 수십 번씩 고민한다. 눈앞의 전투에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단호히 선을 긋고 주도권을 되찾을 것인가. 이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한 번 무너진 원칙은 앞으로 다시 세우기 어려우며, 아이에게 “소리 지르고 떼쓰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학습을 남길까 두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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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불특정 다수의 시선을 무시하기도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은 당장 귀를 괴롭히는 울음소리에 짜증을 느낄 수도 있고, 나 또한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부모로서의 역할은, 단순히 “소리 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세상과의 올바른 상호작용을 가르치는 일임을 알기에, 차가운 시선 속에서도 쉽게 물러설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부모들은 이러한 난처한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 아이가 둘, 셋 이상인 베테랑 부모들은 마치 단련된 전략가처럼 능숙하게 상황을 모면한다. 처음 몇 번 힘겨운 승부를 통해 한번 주도권을 잡고 나면, 이후에는 비교적 수월하게 흐름을 주도하는 법을 터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 같은 초보 부모는 여전히 이 전투가 어렵기만 하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금세 당황하고, 이 상황을 조속히 끝내고 싶어 재빨리 주도권을 양보하고 싶은 유혹에 흔들린다.


그렇지만 글을 쓰면서도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아이를 잘 기르는 일은 단순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더 깊고 오래 지속되는 목표, 즉 미래에 한 사람으로써 온전한 사회 구성원을 키워내는 데 있다. 그 과정에서는 어느 정도의 소음과 불편을 주변에 전달하게 될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


물론 이기적으로 주변을 무시하고 내 아이만 챙기겠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힘겹게 맞서고 있는 이 순간들도, 결국 장기적으로 사회에 도움이 될 한 아이를 키워내는 과정임을 믿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이 지면을 빌려, 공통의 공간에서 때로는 자신과 전혀 무관한 소음을 참고 이해해주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감사를 전한다. 그것은 결국 다 함께 나아가는 사회를 위한 인내이자 배려일 것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포기하거나 양보할 수는 없다.

그들이 보여준 마음에 응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다짐한다.

언젠가 이 아이가 커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같은 너그러움을 베풀 수 있을 그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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