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기도 열심히, 공부도 열심히, 알바도 열심히! 열정! 열정! 열정!
나는 악명 높은 김포골드라인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
포털에 김포골드라인을 검색하면 '혼잡도', '지옥철', '최악' 등의 연관 단어가 추천으로 뜨면서 지칠 대로 지친 탑승객들의 호소가 넘쳐난다. 지옥철에 몸을 맡기기 전 나만의 루틴이 있는데, 일단 가방을 앞으로 메고 귀와 목과 손에 있는 모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가방 속으로 정리한다. 귀에 씌워져 있던 헤드셋을 벗는 이유는 지옥철에서는 높은 인구밀도로 산소가 부족해져서 숨이 꽤 막히는데, 그 와중에 귀까지 막힌 기분이 싫어서이다. 목에 있는 목도리를 벗는 이유는 한겨울에도 지옥철은 찜통이기 때문인데, 나는 더위보단 추위를 잘 버틴다. 그리고 사람 많은 곳에서 '잠시만요!' 한마디를 내뱉지 못하는 내향 인간으로서는 지옥철에서 손에 뭔갈 들고 있다가 혹시라도 사람들 사이에 끼여버리기라도 하면 난 내릴 때까지 아프게 가더라도 소리는 결코 못 지른다. 김포골드라인을 타고 출근한 지는 아직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 루틴은 나에게 꼭 맞는 루틴이기 때문에 실패 확률 0퍼센트로 유지 중이다. 이 루틴이 깨지면 출근도 하기 전에 내 에너지의 반은 고갈된다.
사실은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터라, 여유로이 혼자 가까운 거리를 걸어서 출근하는 것보단 지옥철일지라도 하루에 한두 번 세상 구경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게 꽤 흥미롭다. 심지어 손에 아무것도 안 들고 타는 루틴이 있는데 지옥철은 사람 간의 거리가 매우 가깝기 때문에 내 근처 사람들이 무슨 책을 읽고, 무슨 기사를 읽는지, 무슨 쇼츠를 보는지 안 보려고 해도 보게 된다. 진짜로 일부러 보려고 보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얼마 전 가을, 한창 대학생들의 시험기간이었는지 PPT나 아이패드를 들고 전공 용어가 가득한 자료를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눈에 띄게 많았다. '벼락치기 문화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하네' 싶다가도, '이 지옥철에서도 공부하는 건 기특하네' 싶기도 했다.
이 시간마저도 공부를 하는 그들을 보니 문득,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다 쪼개서 살던 20대 초반의 내가 생각났다. 새벽까지 술은 마시더라도 아침에 지하철 창문에 대고 미적분 풀이는 꼭 해가던 그 시절. 막걸리가 내 몸에서 안 받는다는 걸 모르고 부드러운 맛에 취해 진탕 마시다가 다음날 아르바이트 출근 후 고생했던 그 시절. '잠은 죽어서나 자라지' 마인드로 밤이고 낮이고 평일이고 주말이고 일분일초를 쪼개서 열심히 놀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살았던 내 모습이 스쳤다. 굳이 하루를 놓고 보지 않아도, 누군가가 '너 13년 초여름에 뭐 했어?' 라던지 '3학년 1학기 때 뭐 했어?'라고 물어본다면 '1학기 다니면서 총학생회 했었고, 초여름이면 대동제 준비했었지!', '아르바이트하면서 돈 모으고 있었고, 학술동아리 했었지!'라고 바로 말할 정도로 모든 시간을 꽉꽉 채워서 살았다. (물론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은 현실에 없다.)
그럼 지금의 나는 출근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단 하나의 변수도 만들지 않으려 루틴까지 만들며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이런 내가 너무 많이 변한 건가? 아니다. 사실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여전히 도전을 좋아하고, 매 순간 열정을 다한다. 차이가 있다면, 속도 조절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건 과거의 내가 아주 바라오던 미래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20대 초반의 나는 항상 '남들이 1을 하면 나는 2를 해야지!', '할까 말까 할 땐 하자!'라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게 내 취향과 성향과 역량에 맞는지는 딱히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건 경험이라는 생각과 약간의 경쟁심과 밑도 끝도 없는 열정으로 모든 에너지를 불태웠다. 그리곤 모든 체력이 소모되더라도 '후회 없이 보낸 오늘 하루의 나 칭찬해!'라는 뿌듯함으로 잠들곤 했다. 주변에서 '너는 정말 열심히 산다.'라는 말을 해주는 것 자체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던, 어떻게 보면 참 미련하고도 멋있는 젊은이였다. 굳이 세게 안 부딪혀도 되는데 부딪히고, 걸어가도 되는데 달려가는, 멈출 줄 모르는 그런 급류 같은 사람. 주위를 둘러보기보단 그냥 '열심히 사는 나'에 취해 그 시간을 즐겼다.
그랬던 내가 천천히 걸어도 좋으니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와 함께 걷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서서히 하게 된 건, 21살의 겨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