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폭이 달라진 계기, 봉사활동
수능과 수시가 끝나고 대입과 졸업만을 기다리며 붕떠있던 고3 겨울, 문득 교실 뒤에 게시판에 붙여있던 '인천 아시안게임 자원봉사자 모집' 게시글을 마주했다. 내가 자라온 인천에서 아시안게임이 개최된다고? 딱 내가 20살이 되는 그 해에? 쉽게 오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하며 자원봉사자에 지원했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아시안게임을 알리기 위한 전국 투어와 응원단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성인이 됨과 동시에 '자원봉사'라는 단어와 활동에 익숙해져버린 나는, 21살 겨울에 또 우연히도 대학 공지에 'OO 해외 나눔 봉사단' 공지를 보게 되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오 우리 대학교 이름이 붙은 해외 봉사? 무조건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지원을 했고, 면접을 거쳐 합류하게 되었다. 이번에도 규모 '국내'에서 '해외'로만 커진 또 다른 봉사활동 기회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출국을 앞둔 어느 날, 국제교류단 직원분께서 파견을 앞둔 우리를 불러 이런 질문을 하셨다.
'우리 봉사단 이름이 뭔가요?'
왜 이런 당연한 질문을 하시지? 당연히 해외 봉사단이죠!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해외 나눔 봉사단입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나눔"의 의미예요. 내가 무언가를 일방적으로 주고 온다고 생각하지 말고 서로의 것을 배우고 나누는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솔직히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일단 방금 전까지도 그 봉사단 이름에 '나눔'이 들어있는지도 인지 못하고 있었을뿐더러, '봉사면 봉사지 무슨 나눔? 내 노동력과 시간을 써서 남을 이롭게 하는 게 봉사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넘겼다.
그렇게 무지하고도 교만한 상태로 나는 라오스에 도착했다. 해외에서 단체 봉사단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비행기를 2번 환승하고 버스로 4시간을 지나 겨우 마을에 도착했던 날 밤이 생생하다. 몇 시간을 굶은 탓에 식당을 찾으려 해 보았지만, 식당은커녕 단체로 몸을 앉힐만한 빛줄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었다. 학교도 없는 마을에 식당이 있을 리가. 숙소를 겨우 학교에서 잡아 줬지만 사실상 관광목적의 숙박 시설은 아닌 터라 전기는 시시때때로 끊키기 일쑤 었다. 마을에서 주민들이 우리를 반겨주기 위해 식사를 차려주곤 했는데, 한 숟갈을 뜰 때마다 벌레가 뺄 수 없을 만큼 많이 보였다. '아, 아늑한 공간에서 깔끔하고 푸짐한 식사를 하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니.'라는 불만 섞인 마음으로 수저를 내려놓고, 다음 끼니를 기다리며 그날은 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쌀국수 한 그릇은 사실상 현지에서 일주일치 주급정도 되는 아주 귀한 음식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학교조차 없던 낙후되어 있는 라오스의 우돔싸이라는 지역의 한 마을에 학교를 짓고 오는 것이었다. 학교 건축 공사는 다음 날부터 바로 진행되었다. 건축현장에 가본 적은 없지만, 한눈에 봐도 이 현장은 쉽지 않아 보였다. 시멘트를 섞는 기계조차 없어서 물과 흙과 시멘트가루를 삽으로 직접 섞어야 했는데, 문제는 그 물과 시멘트 가루를 옮기는 기계도 없어서 양동이에 담아 하루에 몇 시간을 운송에 썼다. 마을의 주민들도 나와 연탄을 나르듯 일열로 서서 양동이를 나르는 작업을 도왔다. 이렇게나 자동화가 중요하구나.라는 비교 섞인 생각과 동시에, 순간 삽질도 못하고 힘도 약한 내가 현장에서 굉장히 필요 없는 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동이 몇 통만 날라도 팔이 아파올 정도로 체력적으로 나는 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턴 '이런 속도로 하다간 한 달이 지나도 아무 결과가 안 나오겠다.'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하루 종일 현장 작업에 매진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땅 위에 무언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굉장히 오랜 시간을 쓰다가 뭔가 눈으로 보이는 건축물이 생기기 시작하니 모두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마을의 아이들은 천막으로 된 학교가 아닌 시멘트 건물로 된 학교에서 수업을 한다는 생각에 신이 났는지 맨발로 공사 현장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가끔 우리에게 응원삼아 자연에서 꺾어 온 꽃다발을 수줍게 선물하고 도망가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현장에 미숙한 대학생일 뿐이었고, 벽돌을 쌓는 작업을 할 때도 속도는 나지 않아 실제 현장 라오스 직원들에게 혼나면서 열심히 미장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벌레 섞인 점심을 애타게 기다리는 무던한 사람이 되었다. 그까짓 단백질 소화되면 다 똑같지 뭐. 일단 생존을 위해 뭐라도 먹고 힘을 내서 학교를 완공하는 게 임무라는 생각으로 점차 바뀌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니 근처 주민들이 물도 가져다주고, 현장 근처에서 쌀국수도 만들어 주곤 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학교는 완공되지 못했다. 결국 주어진 시간 내에 완공을 하지 못했고 다른 파견 봉사단이 도착하면 이어서 작업을 진행하기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찝찝한 마음으로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문화교류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학교 현장에서 뛰놀던 아이들, 그 가족과 선생님들, 쌀국수를 해주던 분들과 밥을 해주던 주민들 등 온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 봉사단은 당시 유행했던 케이팝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고생 끝에 봉사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을 때, 마을의 아이들이 한 땀 한 땀 열심히 만든 꽃 목걸이를 들고 나타났다. 환한 미소로 목걸이를 걸어주다가 품에 안겨 우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그때서야 라오스에서의 지난 시간 동안 내가 받은 것들이 생각났다. 새벽에 타지에서 온 우리를 먹이기 위해 쌀국수를 10그릇이나 끓여준 따듯한 주민들의 마음. 입맛에 안 맞을까 본인들은 먹지도 않는 칠리소스, 케첩, 마요네즈까지 항상 한편에 준비해 준 마음. 삽을 잡는 법도 몰라서 사실상 내가 해놓으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할게 더 많은 나를 옆에 두고 괜찮다며 환한 미소로 달래주던 현장 일꾼들. 한국에서 가져온 간식을 나눠줘도 꼭 나눠먹자고 내밀던 밝은 아이들. 게다가 아이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직접 만든 선물이라니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
나는 그저 문화적으로 먼 나라에서 온 태도도 차갑고 딱딱하고 입맛 까다로운, 먹여주고 재워줘야 하는 일 못하는 그저 낯선 사람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도와주러 왔지만 사실상 우리가 받은 게 더 많은 기분이었다. 파견 전에 '내가 도우러 가는 거지'라고 생각했던 그 교만함이 얼마나 창피한 생각이었는지도 깨달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이 감정은 꽤나 오래갔다. 모두의 경험은 다르기에 사실상 사람이 사람을 100퍼센트 도와주는 일이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내가 이런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조차, 미리 라오스 오지 동네에 섭외를 진행한 교직원들과, 경험 많은 선배들의 리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도 다녀와서야 보였다.
이때 이후로 젊음의 경험을 의미있게 채우기 위한 몇 가지 삶의 신조가 생겼다.
경험은 혼자서 채워질 수 없다.
함부로 도왔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
나는 항상 무지할 수 있고, 오늘의 내 시야에서 보이는 것들은 미래의 내가 봤을 땐 아주 좁을 수 있다.
언제나 주변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지 않으면 교만했던 과거를 후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