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상담을 시작하게 됐어요

조심스럽게 감추며 살아온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by soiemoie



상담을 예약하고 나서부터 일주일 내내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머릿속이 분주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단순하게 ‘경험 삼아 가볍게 다녀오면 된다’라는 직장 동료의 말은 내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망상과 불안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온 내겐, 그 말조차 벅찼다.


그리고 고민보다도 내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망상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상상 속에서 나는 상담자를 만나며 나를 비웃는 얼굴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치닫게 될까봐 고민 고르기에 신중해지게 된다. 남들이 들었을 때 적당히 불쌍해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감추었던 치부를 들춰낸다는 건 너무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전에 경험했던 정신과 진료의 기억은 내 불안을 더욱 굳게 잠가놓고 있었다. 닫힌 방과 정적인 공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시선, 나를 표현할 수 없는 내 언어들. 그 기억은 아마 오래도록 내 마음 안에 여러 균열을 남겼던 것 같다.




그럼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다. 긴장되는 마음을 안고 버스를 탔는데 언제나 그랬듯, 너무 일찍 도착해버렸다.


상담실이 있는 곳은 송리단길 끝자락. 각종 핫플레이스가 즐비하고 북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골목 끝에 위치한 오피스텔에 자리하고 있었다. 퇴근 후에 잡은 시간대라 거리가 북적였는데 나만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아직 30분 이상이 남아 있었고, 발걸음이 향하는 대로 그저 목적 없는 걸음을 옮겼다.


외톨이의 시간은 유난히 느리게 흘렀다. 여러 소음 사이로 흘러나오는 음악과 휘황찬란한 간판의 불빛들. 어디를 가도 사람이 넘쳐나는 이곳에서 남은 시간 동안 무작정 골목만 돌고 있는 내게 모든 것들이 낯설게만 느껴져 온다. 그날이 유난히 그랬다.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어떤 표정을 한 이와 마주하게 될지, 머릿속은 여전히 잡념으로 혼잡했다. 그냥 노래나 들으면서 오늘 하루를 복기해본다. 그저 평소처럼. 그러면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상상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가벼운 듯 무거운 공기를 품고 정각에 맞춰 문을 두드렸다. 4층에 있는 상담실은 문은 열리자마자 따스한 공기와 적당한 온도로 나를 반긴다. 은근한 가정집의 분위기를 풍겨 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입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온화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추우셨죠? 오시느라 힘들지 않으셨어요?“ 가볍게 건네는 안부 인사에 추위에 움츠러든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인사를 드리고 들어가려는데 아뿔싸. 신발을 벗어야 한다. 하필 무릎까지 올라오는 롱부츠를 신고 간 탓에, 벗는 데만 애를 먹었다. 천천히 하라는 말씀에도 마음이 급해지니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항상 예상치 못한 상황이 오면 당황스러움이 몸으로 나타나는데, 이 우스운 모습이 30대 중반이라니. 참으로 여전히 어린 아이다.



상담실은 꽤나 아늑한 공간이었다.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체리 색감의 커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가운데 놓여 있고, 벽 한 편에는 커다란 통창이 있다. 바로 그 밑엔 고양이가 용변을 볼 것 같은 커다란 모래놀이 상자가 있었다. 반대편에는 소박한 장식과 피규어들이 줄지어 있었다. 워낙 다양한 종류의 피규어가 있어 어릴 때 즐겨보던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그램에 나올 법한 피규어 수집가이신 것 같았다. 아니면 우리 아이도 장난감을 저렇게 모아서 만들어줄까 하며 좋아할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겨우 자리에 앉자, 선생님께서는 따뜻한 커피와 세 가지 종류의 티백 차를 권하셨다. 카페인이 약한 나에게는 둥굴레차가 제격이었다.

”둥글레차 좋죠. 따뜻하게. 이 질문지만 작성하고 계세요. 금방 올게요.”


오랜만에 만나는 밝고 건강한 사람의 느낌이었다. 차를 내어주시러 가는 선생님을 뒤로한 채 질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감정 상태와 일상의 습관에 대해 척도를 평가하는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결과를 기반으로 상담의 주제가 정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단어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사소한 감정들에 점수를 매겼다. 그 어떤 질문에도 막힘이 없었다.



답변을 마무리하려고 하는 찰나에 두 개의 찻잔을 든 선생님이 돌아오셨다. 그러고는 내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질문지 바로 옆에 김이 모락모락나는 찻잔을 내려놓으신다. 은근하게 퍼져오는 고소한 향기에 노곤해진다. 양손으로 컵을 잡으니 그 온기가 전해진다. 뜨끈하게 올라오는 수증기가 그대로 전해질만큼 뜨거웠는데, 한 모금 마시니 온몸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게 긴장이 풀렸다. 이내 자리에 앉으신 선생님은 살짝 미소 지으면서 나와 질문 답변을 번갈아 보시더니 자리를 고쳐 앉으셨다. 그리고 상담을 신청하게 된 경로를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추천해 준 직장 동료의 이야기를 답변했다. 그렇지만 사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대부분 그러시더라고요. 걱정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얘기 나눈다고 생각하면 돼요.” 라는 말씀에 마지막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사라졌다. 고민은 멈추고 선생님이 이끌어주시는 흐름에만 몸을 맡겼다.



그녀는 일상적인 질문부터 건넸다. 기본적으로 사람을 만날 때 물어보는 나이나 직업 같은 딱딱한 정보형 기반의 질문이 아닌 나를 물어보고 있었다. 최근의 관심사는 무엇인지, 평소에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를. 상담자와 내담자가 라포를 형성하기 위한 단순한 질문이겠지만, 상담을 처음으로 해보는 나에게 있어 그 질문은 조금 낯설었다.


“회사 다니면서 유치원생 아이를 키우고 있어요. 여기에 잘 키우고 싶은 욕심에 유아교육도 공부하고 있어요. 다른 엄마들처럼 저보다는 아이를 중심으로 한 삶을 살고 있어요” 별것도 아닌 나의 대답이었지만 선생님은 그것만으로도 나를 칭찬해 준다.

“참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내고 계시네요”


선생님의 말씀에 무언가 마음 한구석에 울컥한 감정이 올라온다. 어쩌면 듣고 싶은 얘기를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를 시작으로 일상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선생님은 내 모든 말에 다가와 귀를 기울여 주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이 끝날 때마다 따뜻한 반응으로 공감해 주셨다. 사소한 표현 하나도 흘려듣지 않고 진심으로 경청하는 태도가 느껴졌다. 가벼운 칭찬 하나에도 나를 인정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말이 통하는 경험이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이런 느낌 자체가 참 새삼스럽다.



“가족 이야기가 참 궁금한데, 혹시 얘기해줄 수 있어요?”

어느 정도 라포가 형성됐다고 느끼셨는지 이제 한 단계 올라간 질문을 하셨다. 그 질문에 망설이는 나를 눈치채셨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해달라고 하신다. 상담 시간은 총 한 시간으로 그렇게 긴 시간 안에 내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는 찰나의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 입은 자연스럽게 떼어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뇌도 막지 못할 만큼. 먼저 움직인 입이 먼저 나와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꾹 눌러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내 유년기의 어머니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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