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있어도 되는 존재였던 걸까
엄마에 대한 기억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수영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연고도 없는 서울에 아빠만 믿고 상경해 온 엄마에겐 적당한 동네 친구가 없었다. 유일하게 수다를 가장 많이 떨 수 있던 날은, 수업 참관 때 만나 자연스럽게 친해진 엄마들의 모임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서울에 위치했음에도 학생 수가 굉장히 적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각 학년 당 반이 네 반뿐인 작은 학교였다. 1992년도에 약 73만 명의 신생아가 태어났음에도, 우리 학교는 교육부에서 폐지 인가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어쩌면 저출생 시대를 미리 살아본 셈이다.
참고로 나 같은 기질은 정말 저출생 시대는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워낙 낯을 가리고 눈치를 보는 성향 탓에 마음 맞는 동갑내기의 친구를 사귀는 건 아직도 어렵다. 물론 그것이 타고난 성격 때문인지, 사회성을 키워야 할 시기에 집안에서 외롭게 지낸 탓인지 지금도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어린 시절의 나를 지켜주려는 방어기제라도 만들어 본다.
어쨌든 엄마 덕분에라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생겼다는 건 좋았다.
아이들끼리 친목을 다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어른들은 학원을 택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수영은 가성비가 좋은 선택지였다. 어머니들은 수영장 로비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이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물론 우리들도 의자에 앉아서 공부하지 않고 놀면서 운동하는 게 좋았다.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유일한 탈출구였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동네에서 가장 좋다고 소문이 난 수영 학원으로 엄마 기준에서 꽤 나 큰 비용을 지불했다. 집집마다 등하원을 도와주는 버스가 운행되어, 운전을 하지 못하던 엄마도 부담이 덜했다. 나는 엄마와 매번 멀리 버스 여행을 가는 기분이었는데, 그게 아마 친구보다도 좋았던 것 같다.
그 모임 중에 엄마가 유난히 친해졌던 사람이 있었다. 검은색 단발머리에 크고 짙은 눈매, 선명한 입술을 지닌 그 엄마 친구는 어린 나에게 굉장히 이국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때 당시 인기가 많았던 이다도시의 느낌이 났다. 그 묘한 분위기는 아직까지도 내 기억 속에 남을 정도다.
그러나 그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 여성은 내게 '엄마 친구' 대신 '그 아줌마'가 되었다.
그 시절은 IMF가 막 끝나고, 다시금 신용카드 부실 사태로 집집마다 가계가 흔들리던 때였다.
그나마 아버지가 벌어오는 적지만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이 우리 가족에겐 유일한 구명줄이었다. 그 줄을 가늘고 길게 유지하려고 200원짜리 떡꼬치 하나도 못 먹어보고 아껴가면서 살았다. 과일이 먹고 싶을 땐 청과물 도매 시장에 가서 곧 썩을지도 모르는 과일만 주야장천 먹었다. 옷은 현 DDP, 과거 동대문 운동장을 둘러싼 시장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몇 백 원짜리 옷을 중학생 때까지 입었다.
물론 그 생활에 불평한 적도 없다. 장난감은 꿈도 꾸지 않았다.
물려받는 게 익숙한 삶이었다. 언니가 이미 붙여 놓은 스티커북을 그대로 물려받아 뜯다가 찢어진 스티커만 떼고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나중에 커서 돈을 많이 벌면 사고 싶은 리스트만 어눌한 글씨로 적어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아줌마는 달랐다. 발레리나를 준비하던 예쁘장한 딸이 있었고, 나의 친구였던 남자아이는 초등학생치곤 수준급의 피아노를 쳤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예체능을 하던 가정이 풍기는 여유로움은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부유한 분위기였다.
그래서인지 그 남자아이와는 친해지는 게 어려웠다. 가끔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겪어보지 못한 교양의 수준까지 느꼈던 것 같다. 어딘가 가끔 그 친구는 어두운 기색을 내비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그 친구의 눈치가 보였다. 매번 대화마다 흔들리는 동공은 모든 흐름을 멈추게 하곤 했다. 물론 그 정적에 눈치를 본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는 그 눈치를 보고 꼭꼭 숨겨두었던 비상금을 건넸다.
자그마치 5천 만 원.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지금에서는 8천만 원이라는데 당시의 체감 경제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최대 2억 원까지 어림잡아 볼 수 있다.
그렇게 네 식구가 쥐어 모은 세월은, 달콤한 거짓말에 삼켜져 행방불명되었다. 그렇게 수영 학원은 오리발을 착용한 첫날이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아줌마를 본 기억은 없다. 그 아줌마의 집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았다. 엄마와 손을 잡고 걸어가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그 조용한 집에 몇 번이나 갔었다. 물론 집 안에는 들어가 본 적이 없지만. 몇 번이고 벨을 눌러도 열어주는 이가 없었다. 벨튀를 해도 나만 재미있었을 것이다. 몇 번이고 새로 붙은 전단지들 사이로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그 친구는 인사해주지 않았다.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니었다.
“그때 그 친구 기억나지? 만나러 갈 거야”
그러고 나서 4학년 막바지에 다다른 겨울.
솜뭉치 같은 눈발이 한창 휘날릴 때였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그 아줌마를 찾으러 갔다. 그 아줌마의 집은 수영 학원을 도보로 이동해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아파트 단지의 상가만 있어서 세상에 어떤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지 몰랐다. 그 근처를 둘러본 적이 없었는데, 이 뒤쪽에는 대형 쇼핑센터가 3개나 있었다. 마치 다람쥐만 잡던 내가 신수 지역에 입장하게 된 느낌이랄까.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가기 위해 미지의 세상에 첫 발을 내딘 기분이었다.
아줌마가 살던 동네는 이 주변 동네에서 가장 학원가가 모여있고, 특목고가 있는 좋은 동네였다.
단지도 꽤 커서 단지 입구부터 아파트 입구까지 들어가는데 다리가 아팠다. 그럼에도 멋진 조경을 구경하느라 아픈 줄도 몰랐다.
입구에는 내가 이 동네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임을 증명하듯이 통유리문이 마을의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엄마는 입술을 꽉 깨물고 벨을 누르려 한 것 같은데 햇빛에 그 표정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나는 그냥 친구를 다시 볼 수 있던 생각에 그저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닫혔던 문은 3번의 벨소리 만에 열렸다. 20년이 지났고 한 번밖에 방문한 적이 없는 집이지만 여전히 기억난다. 입구부터 거실까지 넓고 깨끗했다. 이 반듯한 집은 기묘할 만큼 추웠는데 신발을 벗는 순간부터 발끝으로 찬기가 밀려왔다. 엄마는 그 아줌마와 테이블에서 얼굴을 마주했고, 나는 친구가 있을 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하긴 했다.
방이 4개였는데 친구도 없었고 가구가 있던 방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 방에는 그나마 옷장과 책상 같은 가구들이 있었는데 드라마 유리구두에서 봤던 분홍색 압류 딱지가 붙어 있었다. 발레리나였던 언니에게는 이제 분홍색 발레슈즈가 없었고, 먼지가 쌓인 피아노도 굳게 닫힌 채 딱지만이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 묘한 분위기를 형용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가자 이제”
엄마는 나를 불렀다. 아줌마에게 인사 한 번 드리고 나왔는데 솔직히 이때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입구를 다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구 구경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친구를 보지 못한 마음에도 볼멘소리를 참았다. 그랬어야만 했던 것 같다.
엄마도 나에게 별 반응이 없었다. 그저 손을 떨고 있었다. 빈 손으로 돌아가는 엄마는 돈을 받지 못한 것보다 아빠가 무서웠던 것 같다.
집에 들어와서 밤새 들려오는 건 엄마 아빠의 싸움이었다. 아니 일방적인 아빠의 폭언이었던 것 같다. 그때마다 엄마는 내 탓을 해왔다. 특히나 폭언이 심했던 날에는, 몸에 맞지도 않는 술을 마시고 어린 딸의 한 마디에 쌓였던 분노를 터뜨렸다. 때로는 몽둥이로, 때로는 말로.
....
너 때문이야 다 너 때문이야
너만 없었어도
그때 지울걸 왜 낳아서
…
너만 아니었어도
너만 없었어도
…
그렇게 이 세상을 알려준 자는, 나의 존재를 부정했다.